역대상 5 |
맏이인 르우벤 지파를 먼저 소개하지 않은 이유(변명 같아 보이기도 한다): 서모 빌하와 통간한 르우벤의 실수(창 35:22)로 장자권이 다른 아들들에게로 넘어가버렸다. 한 순간의 실수가 한평생을 좌우하는 수가 있다. 이런 류의 실수는 어떻게든 사전에 방비해야 한다. 2. 결국 야곱의 장자는 누구인가? 족보상으로는 르우벤, 명분상으로는 요셉(두 몫을 받음 =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독립된 지파가 됨, 형제를 돌봄(창 50:21)), 실질적으로는 유다(주권자, 즉 왕가를 이룸): 그래서 유다지파에 대한 소개가 제일 먼저 나온 것이다. 축복권은 레위지파에게 갔으니 레위지파도 장자권의 일부를 받은 셈이다. 3. 르우벤 지파는 앗수르에 사로잡히기 전까지는 엄청나게 번성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문자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 표현이 그것을 보여주는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인접한) 광야 지경까지: 비록 일시적이긴 했지만 이스라엘의 최대 영토가 동북쪽으로 유브라데 강까지 이르렀다는 말이다. 인구는 증대하였고 가축도 큰 무리를 이루었다. 4. 르우벤의 자손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이 침략한 이유를 왕하 16장에서 찾아보자. 유다 왕이 이스라엘과 시리아(아람)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에 대항하기 위해서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왕하 16:17).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던 디글랏 빌레셀은 이스라엘로 진군하여 갈릴리와 갈르앗 주변의 모든 성읍들을 파괴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B.C. 733년 경). 앗수르가 침입했음에도 이스라엘과 유다가 함께 망하지 않고 유다는 훨씬 더 뒤에 바벨론에 망한 이유다. 5. 요단 동편의 넓은 땅을 가리키는 표현이 무엇인가? 길르앗(9, 10): 한 때나마 크게 번성하였던 좋은 땅을 가리킨다. 6. 갓이 몇 째 아들인데 르우벤 다음에 소개되는가? 7째 아들: 그러니까 여기서는 출생순서대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요단 동편에 거하였던 두 지파 반을 먼저 소개하는 중이다(18). 장자 유다를 제일 먼저 소개하고 다음에는 일단 지역별(아래에서 위)로 소개하는 셈이다. 르우벤 지파가 맨 아래, 그 위에는 갓, 맨 윗 쪽은 므낫세반 지파가 거주했다. 7. 갓 자손도 번창했다. 중요한 우두머리 세 사람을 고른다면? 요엘(12), 아비하일(14), 아히(15): 특별히 이들이 무슨 행적을 남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들이 거주했던 바산은 처음에 얻었던 땅에 비하면 엄청나게 확장된 땅이었다. 아마도 므낫세 반 지파가 차지한 땅의 일부까지도 차지했던 모양이다. 8. 북 이스라엘에 여로보암 왕은 두 명이다. 한 명은 초대 왕이고 다른 한 명은 거의 마지막 시기의 왕이다. 이 족보는 어느 왕 때에 기록되었을까? 후자: 그러니까 앗수르에 포로로 잡히기 직전의 일이다. 9. 여호수아 세대 사람들이 죽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은 제대로 승리를 누려본 적이 없다. 기드온 때 특별한 은혜를 누리긴 했지만 사사시대 내내 이민족에게 시달리기만 했다. 그런데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힘을 합쳐 대승을 거둔 이야기는 아주 이례적이다. 이 전쟁은 가나안 전쟁의 일부분가 아니다. 싸운 상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와 싸웠는가? 하갈 사람들과 그와 동맹한 자들(10, 19-20): 싸운 상대가 가나안 칠족과 다르다(신 8장). 사울왕 때의 일이라면(10)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이 미약하던 때다.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때라도 일부 전쟁터에서는 용감하게 적을 무찌르는 격이다. 이순신 장군이 그랬고, 한니발과 싸운 로마 장군이 그랬다. 10. 다른 두 지파에 비하면 므낫세 반 지파에서는 이렇게 인물이 없나(23-24)? 번성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간단하게 기록했을 뿐 번성했고, 유명한 족장들도 있었다: 므낫세가 요셉의 장자이었지만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복을 넘겨줬다. 그럼에도 크게 번성한 지파가 되어 넓은 땅을 차지했고 크게 번성했다. 11. 길르앗 지방의 두 지파 반이 한 때는 하나님을 힘입어 큰 승리를 얻었다(19-22). 그러다가 왜 사로잡혀 떠났는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25-26):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사는 성도는 한 때 아무리 잘 나가도 하나님을 저버리면 더욱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힘입을 때와 버렸을 때의 모습을 극명하게 비교하면서 선택을 강요하는 셈이다. 12. 요단 동편에서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의 성취다. 그런데 앗수르에 잡혀간 것까지 생각해보면 약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 아닌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 복을 제대로 누리고 보존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몫이다. 주신 복을 지키지 않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버려도 그 약속에 매인 하나님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13.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은 결국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하지 않았다: ‘오늘까지 거기에 있다’는 말은 귀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요단 동편의 기름진 땅을 탐내어 함께 번성했음에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약속의 땅을 떠났다가 결국은 돌아오지 않은 채 영원히 떠나버렸다.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한 것이 위험할 때는 더 큰 위험을 당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힘들어도 형제와 함께 고생하는 것이 덜 위험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