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7


1. 지금까지 언급한 지파는 유다지파(4:1-23)와 그 안에 거주한 시므온 지파(4:24-43)와 요단 동편의 2지파 반과 레위지파였다. 이제 남은 지파는 몇 지파인가? 여기서는 몇 지파를 소개하는가?

    8지파, 6지파: 땅을 분배한 것은 레위지파를 제외하고 12지파였다(요셉지파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되었기 때문). 반 지파가 남아도 남은 것이니 아직은 8지파가 남았다. 여기서는 6지파를 소개한다(잇사갈, 베냐민,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아셀). 그러면 2지파(단, 스불론)가 다음 장에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는다. 단, 스불론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지파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다른 5지파는 남쪽 유대로 넘어와서 지파의 명맥을 이어갔다.

2. 가나안에 들어갈 때 잇사갈 지파의 수는 64,300이었다(민 26:25). 다윗의 때라면 거의 400년 이상이 흘렀다. 그런데 87,000명이라면 전혀 증가하지 않은 셈이다. 왜 그럴까?

    사사시대가 악한 시대였고 복을 받지 못한 시대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지파도 별반 다르지 않다. 더구나 잇사갈의 족보에는 알만한 사람이 없다. 1절의 돌라도 사사기에 나오는 인물(삿 10:1)과 동명이인이다(시대가 전혀 다르다). 잇사갈 지파에서 유일하게 나온 사사를 족보에서는 왜 빠트렸을까? 별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탓인가?

3. 야곱은 베냐민을 물어 뜯는 이리라고 예언했다(창 49:27). 그런 호전적인 기상으로 기브아에서 전체 지파를 상대로 싸움을 하다가(삿 20장) 멸족당할 뻔하였다(첫 번째 왕인 사울을 배출하기도 하고, 나라가 쪼개질 때 합법적인 다윗 가문을 지지하기도 했지만). 그런 기상이 족보에는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베냐민의 아들과 손자는 전부 큰 용사(7, 11)거나 용감한 장사(9)다: 이런 용감함이 때로는 민족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사사를 도와서 시스라와 싸우거나(삿 5:14), 사울이 나라를 세울 때(삼상 17장) 큰 힘이 되기도 했고 나라가 분열될 때 유다지파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데 크게 공헌했다. 베냐민 지파의 이런 역사는 용감하냐 아니냐보다 그것을 어떤 일에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은사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4. 납달리 지파에 대해선 왜 이렇게 간단하지(13)?

    할 말이 없는 탓이다: 특출한 인물도 없고, 특별한 일도 없는 지파였다. 야곱이 말한 대로 ‘놓인 암사슴’처럼(창 49:21) 제멋대로 뛰놀다가 사라진 모양이다.

5. 므낫세의 장자는 누구인가?

    마길: 비록 소실의 아들이었으나 적자로 보이는 아스리엘(실제로는 마길의 손자, 민 26:31)이나 둘째 슬로보핫에 대한 소개보다 훨씬 자세하다. 실제로 마길은 요단을 건너기 전에 길르앗을 정복하였다(민 32:39). 출신 성분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6. 므낫세가 아람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은 마길인데 마길은 누구와 결혼하는가?

    베냐민 지파의 여인(15, 12): 12절의 ‘일’은 7절의 ‘이리’다. 비록 아버지는 이방여인과 결혼하여 자신을 낳았을지라도 자신은 동족에게서 아내를 구했다. 그의 이런 자세가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이다. 아버지보다 나은 자식이 더러 있다. 아버지가 술에 절어 인생을 허비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들 중에는 더 심하게 술에 절어버리는 수도 있지만 절대 술을 가까이 하지 않는 아들도 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결단에 달린 문제다. 부모 탓할 일이 아니다. 부모의 실수를 경고 삼아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복된가!

7. 슬로브핫의 딸들은 유명하다. 민 27:1-11을 읽어보고 이들에게 현대적인 별명을 붙여보자.

    여권신장론자, 여성인권운동가: 아들이 없다고 아버지의 이름이 사라질 수 있느냐고 항의하여 딸들이 상속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8. 21절은 원문 자체가 불분명하여 누가 짐승을 뺏으려고 했는지 시기가 언제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에브라임 가문에 큰 재앙이 있었다는 것이다. 야곱은 에브라임이 ‘큰 족속’ 이 될 것을 예언하였으나(창 48:19), 봉우리째 이렇게 짓밟혀 버렸다. 하나님의 섭리들은 가끔 그의 약속을 배반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런 좌절이 성경의 누구를 닮았는가?

    가인을 낳은 아담: 가인이 태어났을 때 아담은 여인의 후손을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동생 아벨을 죽였으니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형제의 위로다(22).

9. 에브라임의 집안에 다시 아들이 태어나는 기쁨이 있었다 하더라도 슬픈 기억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무슨 흔적이 남았는가?

    아들에게 브리아 곧 ‘재앙 중에’ 라는 우울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고초와 재난이 오히려 소망이 되기도 한다(애 3:19-22). 그런 가운데 딸 세에라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 그 자신의 힘으로 성읍들을 세워(24절) 가문을 영예롭게 했고,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이로써 에브라임 가문에 있었던 재앙도 충분히 회복되고 주도적인 지파가 되었다(북이스라엘은 에브라임이라고 불린다).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받았다고 해서 고난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고난을 이겨내면 꽃피는 날이 기다리고 있다.

10. 훗날 에브라임 지파는 콧대가 높아서 다른 지파와 적잖게 마찰을 일으킨다(삿 8:1, 12:1, 왕상 11:26). 왜 그럴까?

    요셉의 둘째 아들이지만 장자의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12지파의 장자 행세를 하는 셈이다.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된 것이 누구 덕이냐? 바로 자기 아버지 덕분 아니냐? 그러니 큰 소리치는 지파가 된 것이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27):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지도자가 바로 자기 지파였으니...

11. 에브라임 지파는 아마도 가나안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한 모양이다. 낯익은 지명을 찾아보자.

    벧엘, 세겜, 벧스안, 다아낙, 므깃도: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곳이며 세겜은 본격적으로 가나안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전 백성이 모여서 율법을 낭독하던 곳이다. 벧스안은 지금의 벧산이며, 다아낙과 므깃도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다. 아마겟돈이란 말이 므깃도 언덕을 뜻하는 ‘할 므깃도’의 헬라식 발음이다.

    여호수가 땅을 분배했을 때에는 벧엘만 에브라임 경내에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므낫세의 지경에 있었다. 에브라임이 므낫세의 땅을 다 차지했다는 뜻이다.

12. 아셀지파의 족보는 제일 무미건조한 편이다. 한 줄짜리 납달리 족보(13)보다는 훨씬 풍성하지만 너무 단조롭다. 그렇다고 복을 누리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40). 복은 누린 것 같은데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은 아셀지파가 군사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창 49:20, 신 33:24-25을 참고하여 아셀지파의 모습을 그려보자.

    야곱이나 모세의 축복이 주로 농경에 대한 내용이다: 그래서 아셀지파는 군사적인 측면에서나 행정적인 면에서는 별로 힘이 되지 않았으나 농경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공헌한 것으로 여겨진다. 더구나 그들이 분배받은 곳은 기손 강 유역의 기름진 평야지대였다(수 19:17-23). 지파마다 받은 복이 다르듯이 공헌하는 바도 조금씩 달랐다. 우리도 나름대로 받은 달란트가 각기 다르다. 받은 달란트를 잘 사용해서 헌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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