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장 |
있다: ‘나’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돼라. 정 답답하면 ‘바울’이라고 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일종의 패배의식에 젖어 날마다 죄만 짓고 능력도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정말 그러한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 그렇다는 말이지, 실제로 그런 자세로 살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이런 나라도 감히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닮아가기를 노력하자. 그러면 할 수 있다! 2. 도대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가 무슨 상관일까? 이어지는 얘기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면 1절은 앞 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앞장에서 바울은 우상제물과 관련하여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했다.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낮아지셨는지, 자신이 그렇게 살아온 것을 본받으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장 구분에 문제가 있는 셈이다. 3. 남자들의 권위가 허물어지면서 간 큰 남자 시리즈가 등장한지 오래다. 이삿날 남편이 보이지 않길래 찾아보았더니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있더란다. 버리고 갈까 두려워서! 이런 시대에 바울의 말을 그대로 쓴다면 엄청나게 간이 큰 사람이다. 어떤 말이 그런가? 3절) 여자의 머리는 남자, 8절)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 흔히 비판하기를 ‘바울은 여자를 천하게 여긴 사람이었다, 여자를 무시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바울의 진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비판하는 얼치기들이나 하는 말이다. 복음이 전해지면서 가장 수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여자, 아이, 노예들이다. 4.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7장부터 답변을 하고 있는 중이다. 결혼, 독신, 이혼, 재혼, 우상에게 바친 재물, 은사의 사용, 등이다. 그러면 11장에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공중 예배시의 올바른 태도: 당시 여자들은 머리에 ‘야쉬막’이라는 작은 수건으로 머리를 덮어야했다. 지금도 중동지역의 여자들을 보면 눈만 빠꼼히 내놓고 다닌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외출할 때는 장옷으로 얼굴까지 가렸다. 그 당시의 문화적인 관습이다. 지키는 것이 본인이나 타인에게 편하다. 그런데 머리에 쓰지 않는 여자들이 생겼다.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은 멋쟁이 귀부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주장하는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이거나, 내가 여자냐라는 대장부이거나. 아마 미니스커트를 처음 들여왔을 때 야단스러움에 비유하면 될 것이다. 가령, 어떤 처녀가 예배에 아주 야한 차림으로 왔다면 어떻게 충고하는 것이 좋을까? 말을 잘못하면 반격을 당할 수 있다, ‘성경에 그런 옷 입으면 안된다고 했어요? 에덴동산에서의 모습에 아주 충실하지 않나요?’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공적인 예배에서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것이다. 5. 야단이 칠 일이 있다고 마구 야단만 치면 반감을 사기 쉽다. 무슨 얘기를 먼저 하는 것이 좋을까? 칭찬(2): 야단을 칠 때 치더라도 칭찬부터 하는 것이 효과적일 뿐 아니라 상처를 덜 입는다. 6.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창조 원리를 말하는 것: 7-8절에서 다시 설명한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3)는 것은 올림차순(=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도 아니고 내림차순도 아니다. 왜 이렇게 순서가 어지러운가? 7. 머리에 무엇을 쓴 남자를 생각해보란다(4).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어떤 느낌을 주었을지 오늘날의 모습으로 예를 들어보자. 아마 귀고리에 화장을 예쁘게 한 남자 정도 아닐까? 꼴불견! 속이 메쓱거리거나...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는 것도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에 쓰라는 것이다. 아마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이것도 아무렇지 않을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 때 사람들은 ‘남자가 무슨 화장을 하고?’ 하는 사람을 가리켜 고리타분하다고 할 것이다. 8. 칭찬(2)도 하고 가정(4)을 통해서 은근하게 권하더니 이제는 단호하게 직설적으로 호통을 친다. 야단을 치더라도 이런 절차를 밟아가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공부하기 싫거든 학교 때려 치워라’에 해당하는 말은? 6절: 머리에 쓰기 싫거든 밀어버려라. 9. 남자가 여자에게서 났지 어떻게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나(8)? 일반적인 출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10. 아무리 야단을 치더라도 그럴만한 설득력이 없으면 순종하는 듯 싶어도 이내 원래대로 돌아가버린다. 여자는 머리에 쓰라고 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창조의 원리가 그렇다(7-9):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란다. 11.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란다(7).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위임받음: 창조물에 대한 통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랬다. 범죄한 이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불행하여졌다. 12.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란 말(7)이 무슨 뜻인가? 여자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다. 돕는 배필? 조수인가? 다른 짐승도 많았는데? 하나님의 역할을 가리켜 돕는 자라고 했다(시 54:4, 시 118:7, 신 33:29, 시 30:10). 조수의 개념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쩌면 제 역할을 잘하는 여자는 남자에게 하나님 만큼 위력적인지도 모른다. 잘 수행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남자가 살아나기도 하지만 죽기도 한다. 남자가 여자를 조종하느냐 여자가 남자를 조종하느냐? 여자한테 이기는 남자가 잘 있느냐? 여자가 본연의 위치에 서 있을 때 여자를 이길 수 있는 남자는 없다. 여자가 남자에게 이기려고 힘을 쓰고 악을 쓰면 이기기 어렵다. 13.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지어졌다.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여자는 남자와 싸웠다. 그래서 이기기도 했지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마 끝없이 싸울 것이다. 바울은 도대체 뭐가 다르다고 말하는가? 창조의 순서가 다르다(8-9). 남자를 대표로 세웠고 여자는 돕는 배필로 지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한 말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이다. 아내가 남편보다 못나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 땅에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신체적인 차이는 여기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수적인 것이다. 14. 남자와 여자는 맡은 역할에서 다른 점이 있지만 다르지 않은 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서 난 점(12): 창조의 과정과 질서에서 다른 점이 있더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다. 15. 유익이 못 되고 해로운 모임이라면(17) 모이지 말아야지? 그래도 모여서 유익이 되도록 고쳐 나가야 한다. ‘공부 그래 하려거든 학교 그만두라’고 한다고 그만 두면 안된다. 더 터진다. 16. 여자가 머리에 쓰는 문제와 성만찬에 대한 문제 중 어느 것이 더 심각한가? 성만찬의 문제: 머리에 쓰는 문제에 대해서 시작할 때는 칭찬으로 시작했지만(2), 성만찬의 문제를 말하면서는 칭찬하지 않기 때문이다(17, 22). 아마도 성만찬만의 문제가 아니라 12-14장에 이르는 책망(은사의 문제에 대한) 전부를 염두에 둔 것이리라. 18절이 첫째 다음에 둘째가 없는데 아마도 12장에서 시작되는 책망이 둘째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17.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분쟁이 있기 때문(편당): 이겨서 성찬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본 의도는 성찬의 방법을 가르치려는 것보다 책망하기 위함이다. 성만찬의 이런 의미도 모른 채 먹는 일에만 열심이냐? 18. 편당이라는 것이 전혀 무익하지만은 않다. 무슨 유익이 있는가? 누가 옳은 사람인 줄 드러나게 함(19): 19절은 일종의 비꼬는 표현이다. 문제가 어려워야 진짜 공부 잘 하는 사람이 드러나지 너무 쉬우면 누가 잘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다 100점인데! 19. 이 본문이 오늘날 우리의 성찬예식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함께 나누는 식사였다(21). 애찬이라고 하는가? 먼저 온 사람은 배부르게 먹고, 나중 온 사람은 배가 고프다면 그것은 성만찬이 아니다(20). 그럴 바에야 집에서 먹으라(21, 34)! 20. 예배 마치고 식당에 빨리 가야 편하다. 혹시 뒤에서 얼쩡거리다가 밥이 부족하면 곤란하잖아? 이런 사람에게 사도는 뭐라고 하는가? 집에서 밥 먹어라. 21. 그러니까 여기서 야단맞는 고린도 교인들은 엄밀히 말해서(요즈음 우리가 이해하는 식의) 예수님의 몸과 피를 범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슨 죄를 지었는가? 교회를 업신여기고 형제를 부끄럽게 한 죄(22): 이런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주의 몸과 피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범한 죄는 이것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성만찬을 설명한 결론은 ‘모일 때에 사로 기다리라’는 것이다(33). 22. 흔히 말하기를 교회가 떡과 포도주로 성찬 예식을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찬 예식은 추도식인가? 아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24, 25, 눅 22:19)은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활없는 죽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예수를 기념하는 내용 속에, 죽음, 부활, 재림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죽음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하신다(26). 23. 성만찬을 제정하신 것은 잡히시던 날 밤 만찬장이었다. 그 자리에 바울은 없었는데? 바울이 전한 복음이 결국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계시로 주신 것이라는 말이다. 24.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예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행위이다. 왜 이렇게 야만스런 말씀을 하셨을까? 대속적 죽음에 대한 상징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으면 죽으리라’는 말씀을 어긴 죄로 죽어야 하는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다. 그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25. 건강한 자에게는 의인이 쓸데없고, 병든 자라야 의원이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구하러 왔노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합당치 않은 자가 주의 떡이나 잔을 마시는 것은 안 된다’고 하시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오히려 죄인이 꼭 먹어야 하는 것 아닐까?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살피고 먹으라는 뜻이다: 28절의 ‘그 후에야’(후토스)는 ‘이와 같이’라는 뜻이다(바울 서신에만도 70회 이상 등장하는 흔한 접속사). 세례받기 전에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은 그 동안엔 주님의 대속적 은혜를 포기하라는 말인가? 우리의 죄는 성찬에 더 간절하게 참여해야 할 이유가 된다. 결론은 서로를 배려하라는 의미지 먹지 말라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33). 26. 성만찬은 새 언약이란다. 그러면 이전 언약은 무엇일까? 모세의 언약(출 24:8):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를 쓰고 지키려던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 짐승의 피를 뿌리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뿌림으로 새로운 언약을 제정하신 것이다. 더 이상 짐승의 피를 뿌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약속의 땅에서 떠났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결과다. 그래서 새로운 언약이 제정될 필요가 이미 있었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렘 31:31-34,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실 새 언약에 대한 예표이다. 27. 고린도 교회에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든 자가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아마도 죄(심판, 판단)를 먹고 마셨기 때문(29): 가난한 자들의 배고픔을 무시하고, 있는 자들끼리 먹고 마시는 교회에 병자도 많고, 죽는 자도 많단다. 28. 31절의 ‘판단’은 징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피지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를 징계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원한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32):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최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