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4장 |
목표: 사랑을 좇아 가라는 말이다. 방법이 아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 성도들과 함께 이런 저런 일을 할지라도 목표가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훌륭한 사업을 이루었지만 결과적으로 함께 고생한 형제들끼리 서로 반복하고 질시하게 되었다면 일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다. 2. 바울의 말은 방언을 하지 말라는 말인가? 하라(5, 18): 방언을 하는 것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1)는 말 속에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예언하기를 권하면서 방언을 무가치한 것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단지 예언을 소중하게 여기다 보면 방언은 자연스레 문제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교훈을 주고 있다. 방언의 필요성이라면 하나님께 하는 것(2),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22)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하기를 원하나... (5),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18). 3.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를 세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일이었다는 뜻에서 ‘비밀’이라고 표현했다(롬 11:25, 골 1:26... ). 2절의 ‘비밀’도 그런 뜻일까? 놀라운 것이라기보다는 별 의미가 없는 것: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의 비밀은 계시로 인해서 내용이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의 비밀은 결국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 말이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는 문맥에서 사용된 것이므로 방언으로 하는 것에 놀라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4.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고 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방언은 알아 듣는 자가 없는(2, 6, 9, 13) 반면에 예언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이기도 하다(4). 5. 예언이 무엇인가? 장래사를 미리 알아 맞추는 것인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3)인데 결국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19), 책망하는 것, 판단하는 것, 마음의 숨은 일을 드러내는 것(24-25), 배우게 하는 것과 권면을 받게 하는 것(31)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을 말한다(4): 정리하면 그리스도와 관련된 계시를 바르게 전달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을 잘 밝혀내어 전하는 것을 말한다(벧전 1:10, 벧후 1:19-20, 계 10:11). 6. 5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가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는 말을 ‘...방언을 말하는 자가 ... 예언하는 자가 더 위대하니라’로 바꾸면 의미가 달라지는가? 의미는 비슷한데 방언하는 자를 무시하지 않는 측면이 강하다. 원어의 표현은 후자인데 번역하는 과정에서 본문처럼 바뀌었다. 아마도 우리 조상들은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을 어색하게 여겼던 때문일까? 7. 계시, 지식, 예언, 가르치는 것’은 바울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상호 관련이 될까? 계시는 다른 모든 것의 근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거나 성령의 감동이 없다면 다른 아무 은사도 소용이 없다. 계시가 있어야 깨닫게 되고(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그것이 지식이 된다(지식은 계시를 받은 성도가 알게 되는 것). 이것을 성도들에게 알게하는 것이 예언이고, 그것을 실제 상황에 적용하도록 구체적으로 풀어주는 것이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는 각각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8. 옛날 중세 때에는 라틴어로 예배를 드렸다. 라틴어만이 신성한 언어로 여겼기 때문인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설교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바울이 알았더라면 무엇이라고 했을까? 그것이 성도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6)? 루터가 로마교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힌 중요한 범죄 중의 하나가 신성한 하나님의 말씀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일반 대중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로마교에서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단다. 9. 저(피리)는 부는 악기고 거문고는 튕기는 악기다. 악기들마다 음색이 달라야 한다는 것은 성도들의 무엇이 달라야 한다는 말인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소리를 분명하게 내서 사람들이 알아듣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피리는 피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소리를 내야 하고, 거문고는 분명하게 거문고 소리를 내야 한다. 이어지는 나팔에 대한 설명과 동일한 비유다. 10. 나팔이 진격을 말하는지, 후퇴를 말하는지 뭘로 아는가? 다른 선율: 이게 분명치 않으면 엄청난 혼란을 일으킨다. 뜻을 모르는 방언으로 공중기도를 한다는 것은 이와 같다는 말이다. 11. 자신도 잘 모르는 것을 가르쳐야 할 때가 더러 있을 수 있다. 이 때는 가급적 어려운 말로 하면 된다. 가르치는 사람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듣는 사람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다. 설교를 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듣는 사람이 알아듣는 말을 하는 것이다(9). 배우는 사람의 상태를 잘 파악하는 것이 가르침의 기본이다. 초등학생을 앉혀두고 어른들의 말로 설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설교에서 회개를 강조할 것인지, 행함을 강조할 것인지, 상급을 강조할 것인지는 성도들의 상태를 잘 살핀 뒤에 결정할 문제다. 오늘 처음 교회 나온 사람들에게 선교를 강조하거나 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것은 순서가 많이 바뀐 일이다. 12. 말을 못 알아들으면 왜 야만인이라고 할까? 무식한 게 아니고? ‘외국인’이란 뜻: 번역상의 문제인데 당시로는 헬라말을 못 알아듣는 외국인은 곧 야만인이었다. 외국인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13.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가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12)? 교회의 덕 세우기(3, 12, 17, 22): 신령한 능력을 사모하여 얻었다 하자. 결과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다른 사람에게 없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니다. 그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어야 옳다. 그 능력을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혹은 자랑하기 위해서 쓸 수는 없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사용하려고 한다면 참으로 힘든 일이 많다. 자랑하지 않으며 겸손하게 자신의 신령한 능력을 사용하기란 엄청난 인내와 자제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14. 통역이 필요한 방언이란 어떤 기도를 말하는 것일까(13)? 그냥 방언으로 기도하면 되는 것 아닌가? 대표기도: 개인적인 기도야 굳이 통역이 필요치 않다. 만약 대표기도를 방언으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 누가 아멘할 수 있겠는가(16)! 15. 영으로 하는 기도(찬미)와 마음으로 하는 기도(찬미)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영으로 기도하는데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14)? 영으로 하는 기도는 남이 알지 못하는 기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남이 알아듣는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은데(16절 참고)? 영으로 하는 기도(찬미)는 기도하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기도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도 못 알아 듣는 기도라면 일종의 무아지경 아닌가? 깊은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뿐이다. 반면에 마음으로 하는 기도(찬미)는 기도하는 사람의 의지가 작용하는 기도다. 우리의 일반적인 기도가 이것이다. 16. 교회 안에 웬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있는가?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나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이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면 그들이 ‘어찌 아멘 하리요?’ 설교자들이나 가르치는 자는 듣는 사람들이 ‘아멘’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가끔은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열변을 토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듣는 사람이 알아듣는지도 모른 채 혼자 열심을 내기도 한다.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잘 살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방언같은 설교’를 하는 수가 생긴다. 17. 예언이 방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에게 덕을 세우기 때문(3, 22): 18. 바울은 분명히 방언을 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는 방언을 하라는 말인가, 하지 말라는 말인가? 조금은 부정하는 쪽: 개인적으로는 하되 교회 앞에서는 자제하란다. 굳이 하려면 통역을 하던지... 아니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라도 가르치든지... 19. 느닷없이 말하는 지혜와 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20)인가? 지혜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 악은 개인적으로 받은 은사를 자랑삼아 드러내는 것: 하나님께 받은 신령한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지침을 주는 셈이다. 20. 21절에 인용된 본문(사 28:11-12)의 본래 의미는 ‘선지자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으니 그렇다면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들려주겠다’는 것이다. 징계로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고린도 교회의 어떤 모습과 상관이 있는가? 온통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본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반응(23): 그렇게 되면 이사야의 예언대로 침입한 외적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처럼 방언을 보고 미쳤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희망이 없는 것 아니냐는 뜻이다. 방언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하는 것(22)임에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더 이상의 유익이 없다. 21. 방언과 예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말뜻을 알아듣느냐 못 알아듣느냐의 차이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교회에 왔을 때 모두가 방언을 하고 있으면 뭐라고 하는가? 반면에 예언을 하고 있을 때는 뭐라고 하는가? 미쳤다(23) ↔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다(25): 예언하는 모든 사람이 믿지 아니하는 자의 허물을 알고 책망을 한다는 말은 특별한 경우(베드로, 바울)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으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2. 성도들의 모임에 나타나는 현상 중에(26) 왜 예언이 없을까? 가르치는 것과 계시가 내용상 예언과 동의어이기 때문: 6절에는 가르치는 것과 계시가 예언과 분리되어 있다. 좁게보면 차이점이 있을 수 있으나 크게보면 같은 내용이다(7번 참조). 중요한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다. 23. 방언이나 예언을 질서있게 하라는 것은 이것이 예배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나 마구 나서면 중구난방으로 예배가 안된다. 통역이 없는 방언을 자제해야 할 이유도 예배의 유익을 위함이다. 예언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분변: 성령의 감동으로 행하는 예언에도 분변이 필요하다니? 초대 교회에서는 분명히 오늘날보다 더 분명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성경도 없었고, 말씀을 가르칠 목사도 없었으니 그래야 했을 것이다. 주의할 점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격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도구처럼 사용하시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예언에도 그 사람의 주관적인 요소가 가미될 수 있으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분변할 필요가 있었다. 이단들이 활개를 치는 오늘날에는 더더욱 말씀을 들을 때에 분변해야 할 이유가 있다. 2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이 한 마디로 인해서 여자는 목사가 되거나 설교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바울의 이 말이 여자는 앞에 나서서 가르치면 안된다는 말일까? 그런 의미로 이해되는 또 다른 구절(고전 11:5)과 그 반대의 말을(갈 3:28, 롬 16:1-2(뵈뵈를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디아코노스: 고전 3:5사역자, 롬 13:4 사자, 롬 15:8 수종자), 브리스가와 아굴라(롬 16, 행 18:24-26), 고전 11:11-12, 고전 11:5(금지하지 않았다) 비교해보자? 이상을 종합해보면 이 구절이 여자가 나서서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어렵다. 25. 원어상으로 36절은 앞단락과 접속사로 연결된 문장이다. 여자들에게 교훈을 주다가 느닷없이 고린도 교회의 전체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된 걸까? 잘 모르겠음: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람 [36절의 ‘너희’는 남자들이다. 바로 앞에 ‘그러나’라는 접두사가 있다. 그러면 34-35는 이 남자들의 생각을 바울이 대신 말하는 셈이다.] 26. 14장은 예언을 하라고 권하는 내용인데 예언이 무엇인지 관련된 표현을 본문에서 찾아보자.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3),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다(6),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9),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말(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