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장


1.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전혀 다른 문제를 다룬다. 고린도 교회의 어떤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대답을 하는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12):

2. 바울이 전한 복음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다 알텐데 새삼스럽게 알게 하다니(1)? 이미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면서(1)?

    전하여준 대로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 복음을 받아들일 때 이미 믿었고, 그 말씀에 따라 지금까지 살았다고 하면서 이제 와서 부활이 없다고? 이 어리석은 자들아! 복음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믿는 흉내만 내고 있는 자들에게 다시 한번 각성을 촉구하는 표현이다.

3. ‘나의 전한 말을 굳게 지키는 것’이나 ‘헛되이 믿지 않는 것(=제대로 믿는 것)’은 같은 말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인가?

    전하여준 대로 믿는 것.

4.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는가?

    오백여 명(6): 재미삼아 생각해보자. 게바 + 12 제자 + 오백여 형제 + 야고보 + 나 = 오백여 명이다. 왜냐고? 굳이 수학적인 표현인 오차의 한계나 유효숫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게바는 12 제자 안에 포함되어 있고, 12 제자는 오백여 형제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그 시절에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 태반이나 살아 있을 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증거가 소용이 없는 것이 믿음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믿어지는 것은 참으로 큰 복이다.

5. 예수께서 살아나신 증인들은 아직도 많이 있다. 그 외에 또 다른 부활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을 3-11절에서 두 가지를 더 찾는다면?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3, 4)과 바울의 회심(9-10): 그 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우연이나 유대 지도자들의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교회를 핍박하던 내가, 도저히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내가 이런 정도의 체험이나 확신없이 이렇게 바뀌었겠느냐? 그 외에 추가로, ‘내나 저희나 동일한 말씀을 전한 것’(11)도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6. 야고보는 12사도나 500여 형제 중에 들어가지 않는가(7)? 그러면 누구일까?

    예수님의 동생: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요 7:5). 그러나 훗날 주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된 것과 야고보서를 기록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개종하였을 것이다.

7.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비슷한 표현으로 어떤 것이 있는가?

    칠삭동이, 팔삭동이, 팔푼이: 이런 표현들의 공통점은 모자란다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가 될 자격이 없는 자라고 여겼다(딤전 1:15, 엡 3:). 왜냐하면(원어에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기 때문이다(9).

8.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최선을 다 하고서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바울에게서 그 답을 찾아보자.

    내 힘, 내 능력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수고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10): 내가 나서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 하실 것이라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철부지다. 스스로 최선을 다 하고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다. 교회를 핍박하던 자신이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결코 스스로의 힘이나 의지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이후 스스로 온갖 수고를 다하였음에도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주신 은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노력과 나를 이렇게 만드시기 위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노력을 생각해보면 자명한 일이다. 추수감사절에 추수한 곡식을 가져와도 출애굽에 대한 감사를 먼저 드리라고 가르치셨던 것(신 26장)과 같다.

9.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안 믿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12-13)?

    사두개인들처럼 영혼, 천사, 내세를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세를 믿지 않으므로 부활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이라면 예수의 부활도 당연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에 바울은 성도의 부활이 있음을 논증하려고 한다.

10.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13, 16)?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인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효용의 문제다(15b), 즉 우리가 다시 사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이유가 없다. 아무 소용없는 짓을 왜 했겠느냐는 것이다. 아직도 살아있는 증인들이 증언한 것처럼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장차 그왁 같은 부활이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라는 논증이다. 가령, 숙달된 조교의 시범은 그것을 따라서 배울 훈련병들이 있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배울 사람도 없는데 조교가 쓸데없이 시범을 보일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11.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왜 사도들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인가(14, 17)?

    죽으면 끝인데 무엇때문에 살아서 이 고생을 하느냐는 말이다(30-32). 예수 믿음으로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딜 이유가 없다. 즐기면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니... 우리는 미쳤다고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겠느냐?

12.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첫 열매가 무슨 뜻인가? 설마 ‘제일 먼저 열린 열매’라고 답하지는 않겠지요?

    예시(23), 대표(레 23:10-14): 첫 열매를 보면 앞으로 어떤 열매가 차례대로 맺힐 것인지 안다.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된다는 뜻이다. 과일나무를 심으면 몇 년이 지나야 열매가 맺힌다. 첫 열매가 맛이 없다면 몇년을 기다린 보람이 없다. 앞으로 열릴 열매도 다 실패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추수를 하면 처음 수확한 것을 하나님께 바쳤는데 이것은 다른 모든 열매나 곡식의 대표성을 지닌 것이다. 결국 첫 열매는 나중에 수확하는 다른 열매와 동일한 것이다. 예수가 첫열매라는 것은 우리도 동일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뜻이다.

13. 한 사람의 불순종이 모든 사람을 사망으로 이끌었다. 반대로 한 사람의 순종이 모든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 길을 열어주었다. 이런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제 2의 아담(혹은 마지막 아담, 45):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이 망쳐버린 시험을 대신 다시 치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주자(선수)를 교체한 셈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역 초기에 치른 세가지 시험(눅 4:1-13)이 하와가 치른 시험(창 3:6)과 흡사하다.

14. 부활에도 순서가 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요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 즉 그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에는 누구인가?

    그 다음 대상은 없다: 23절의 ‘차례대로’라는 표현이 좀 헷갈라게 하지만 부활에 대한 더 이상의 순서는 없다. 24절의 ‘나중’이란 말이 불필요한 오해를 부르지만 부활의 순서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불신자들도 예수의 재림 때 동시에 부활할 것이다(요 5:29, 계 1:7).

15. ‘그 후에는 나중이니’(24)라는 말은 ‘그 후에 마지막 날이 올텐데’라는 말이다. 이 마지막 날은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이며 성도가 부활하는 날이다. 이 날은 곧 어떤 날인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날 =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시는 날 = 정말 오랜 세월 동안 심혈을 기울인 하나님의 소망이 완성되는 날 = 독생자까지 희생시켜가면서 하시고자 구속의 역사를 마무리 하시는 날 =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던 그 기쁨이 깨어졌다가 다시 더 크게 회복하시는 날...

16.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멸하시기까지 불가불 왕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25-26)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강조하는 말인가?

    사망이 멸망 당할 날이 있다: 사망이 멸망을 당한다는 것은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불가불 왕노릇하시는 이유가 사망을 멸망시키기 위함이다. 사망을 멸하면, 다시 말해서 죽음이 없어지면 모두가 살아나는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사망이 왕노릇을 한다면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 왕노릇하시면서 사망을 멸한다. 그런데 어떻게 부활이 없겠느냐?

17. 27-28절의 말씀이 ‘부활이 있다’는 말과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만유의 주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부활이 없느냐?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어서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려드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만유의 주가 되신다. 그 과정에 일시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죽음일 뿐이다. 그 죽음이 멸망당하게 되면 영원한 삶이 존재한다.

18. 고린도 교회에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행위이지만 바울이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율배반이 아니냐? 부활이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는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바울은 이런 일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조차 없다.

19. 부활이 없다면 바울과 성도들이 하는 일 중에 어떤 일이 어리석은 짓인가(30-32)?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는 것과 날마다 죽는 것: 차라리 맹수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 낫지! 맹수로 더불어 싸우는 것도 명예나 부가 생길지는 몰라도 사실은 쓸데없는 짓이요, 무모한 짓이다. 이겨봐야 구경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부활이 없다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보다 못한 짓이라는 말이다.

20. 결과적으로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어떤 자와 동일한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34): 부활을 부정하면서 바울보다 더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면서 방종한 삶을 사는 무리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영지주의자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 그런 자들을 경계하라고 권하는 셈이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는 이 말은 일종의 속담처럼 사용된 모양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근묵자흑’이다. 그런 친구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정신차려라(34절의 ‘깨어’)! 하나님을 알기는커녕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21.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썩어서 사라져 버렸는데 어떻게 부활하느냐고 물은 데 대한 바울의 대답이 아주 길다(36-54). 요점만 말한다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하여 부활한다. 씨가 썩어서 온전한 나무가 되어서 자라나듯이 더 완전한 다른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다!

22.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이해한 부활은 죽기 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활할 것을 말한다. 부활의 이전의 우리 몸과 부활 이후의 몸은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세 가지로 정리해보자(37-44).

    종자와 형체(37-38): 종자는 ‘뿌려진 씨’ 형체는 ‘다시 살아난 씨’라고 할 수 있다. 뿌려진 씨가 썩으면 전혀 다른 모습, 더 크고, 더 온전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자라나는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성을 가진다.

    다양한 형체(38-41): 비슷비슷한 모양의 씨를 뿌려도 하나님께서 각 종자에게 다양한 형체를 주시는 것처럼 부활한 우리의 모습도 현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하물며 뿌리기 이전의 모습도 이렇게 다양한데(39-41) 다시 살아난 형체는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질적인 향상(42-47):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육 있는 자가 신령한 자로, 땅에서 난 자가 하늘에서 난 자로 다시 살게 된다.

23. 45-46절의 의미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함과 같이’라는 표현이 있으므로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에게 닮은 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게 무엇인가?

    변화: 첫 사람 아담은 (변하여) 산 영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도 (변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 아담이 흙이 변하여 산 영이 된 것처럼 그리스도는 육 있는 자를 변하여 신령한 자가 되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인 것 같다.

24. 48절의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와 의미가 어떻게 다른가? (47절에 따르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임을 참고해서 생각해보자)

    전자는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흙에 속한 자’를 가리키며(↔ 49절의 은혜를 입지 못 하는 자) 후자는 ‘현재 흙에 속한 자’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하늘에 속한 자가 되지 못하는 자에 대한 언급이다. 그러면 그 다음의 ‘하늘에 속한 자’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면 된다. 지금은 비록 ‘땅에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는 장차 하늘에 속한 자가 될 것이다.

25. 부활 때에 우리의 몸이 변화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50):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것인데 썩을 몸으로 어떻게 영원한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마치 슈퍼맨에게 우리가 입는 옷을 입힌 꼴이다. 슈퍼맨이 제트기보다 더 빠르게 날아가는데 그런 옷을 입혀 놓으면 다 찢어져 버린다.

26. 부활한 몸으로의 변화(52-54)를 설명하다가 바울은 감격했던 모양이다. 소리 높여 외친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 이 장면이 누구와 닮았는가?

    골리앗의 목을 벤 다윗: 최고의 원수,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던 원수, 사망이 죽었기 때문이다. 사망이 죽다? 이제는 더 이상 사망이 힘을 쓰지 못한다. 사망이 없는 세상, 즉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을 그리며 감격하는 것이다.

27.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6)는 말은 율법으로는 도대체 희망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57): 율법이 아닌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이런 수고가 주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은 줄을(58)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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