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장


1. 복음을 전하는데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1)는 게 무슨 말일까? 설교나 성경을 말로 가르치지 않으면? 지혜로 가르치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유식한 인간의 말이나 말재주를 부리지 않았다는 뜻: 잔꾀,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온갖 지혜를 동원해야 한다. 말씀이 중요하다면서 그냥 읽어주기만 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말씀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고, 흥미롭게 듣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다. 이것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나도록(=그리스도와 십자가만 드러나도록) 최선을 다 했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2. 복음을 가리켜서 왜 ‘하나님의 증거’라고 할까?

    하나님께서 (계시하심으로) 보증한 것이니까: 복음의 기획자, 실행자, 홍보자가 하나님이시니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이 없다. 어떤 사본에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3.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단다(2).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의 구체적인 예가 뭘까?

    인간의 말 재주나 철학, 도덕: 이런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말도 않고 재주도 부리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엉뚱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거꾸로 진짜 가르쳐야 할 것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온갖 말과 지혜를 다 동원했다는 말이 된다(4절의 ‘내 말과 내 전도함’, 6절의 ‘지혜를 말하노니’). 오죽하면 ‘말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을까?

4. 바울은 왜 그렇게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을까(3)?

    한 생명이라도 건지기 위한 조심스러움이다. 혹시 실수라도 해서 누군가가 실족할까 하는 두려움이다. 어린 새싹을 다루는 농부처럼, 갓난 애기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당대 최고 권력자 앞에서도 담대하게 할 말을 다 한 바울이지만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태도는 이러했다. 이렇게 사역할 때 얼마나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는지 알려면 사도행전 18장을 참고하라.

5.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전혀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저 기적만 일으키면서 하나님을 증거했을까(4-5)? 아니다. 분명히 열심히 말을 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 되지 않도록 조심했을까?

    지혜의 권하는 말(4), 사람의 지혜(5): 인간적인 논쟁이나 설득같은 노력 때문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분명하게 깨달은 자가 열심히 말을 하고, 지혜롭게 전하려고 최선을 다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간절하게 설교를 하지만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나의 인간적인 목적이나 의도하에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요, 의도에서 된 일이란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내가 아니요, 하나님이시다.

6. 어린 아이들에게는 해줄 수 없지만 어른이 되면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있다. 이제 알아들을 만하니까 하는 말인데... 그게 뭔가?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는들에게는 말해도 어리석거나 거리낄 뿐이다. 믿는 성도들만(=온전한 자)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하려는데, 그것은 만세 전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한 것이다(7). 바울이 전한 복음은 세상의 지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7. 비밀을 뜻하는 영어글자는 secret도 있고, mystery도 있다. 7절의 비밀은 어느 것일까?

    mystery: 비밀이라기보다는 신비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것이다.

8. ‘영광’이란 단어는 거의 모두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출 24:17, 민 14:10, 시 24:7-10).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도 ‘영광의 하나님’이었다(행 7:2). 예수님에게 적용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8, 약 2:1). 그런데 ‘우리의 영광’이란 말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예정하신 모든 계획을 다 이루시는 날의 우리 모습이 영광스런 하나님과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범죄함으로 깨어진 우리의 본래 형상이 회복되면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이 우리에게도 회복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구속하사 이루려하시는 하나님의 원하심이다. 이것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9. 오래 전에 통일교에서 ‘누가 예수를 죽으러 왔다고 가르치는가?’라는 제목으로 신문 전면에 광고를 냈다. 요지는 ‘예수는 죽으려고 온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실수로 예수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무를 완성치 못했으므로 그 일을 완성하려고 내가 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느라고 인용한 구절이 8절이다. 이 구절의 인용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관원들이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9):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으신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다. 더더구나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이 임무를 완성치 못한 것이 아니다. 성경 곳곳에서 예수는 죽으려고 왔다고 하셨다. 자신도 그렇게 말씀하셨으며 스스로 죽을 곳으로 찾아가셔서 죽이지 않을 수 없도록 도전하셨다.

10.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은 것은 비밀스런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된 일이다. 세상의 내로라 하는 관원들도 알지 못했던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성령이 보이셨다(10): 세상의 관원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예수를 죽였을 뿐이지만 성령이 보여주신 바에 따르면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누가 알고 가르치겠는가? 오직 하나님께로서 온 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고 하신다.

11. 성령은 놀라운 비밀, 곧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자격이 있다. 왜?

    하나님의 영이시니(11): 세상의 영을 받은 자는 예수의 죽음에 담긴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다. 말도 안되는 얘기다. 반면에 우리는? 성령받은 증거가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한다. 자연인의 생각과 믿음으로는 예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믿게하시는 이가 성령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신 이도 성령이시다. 즉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12. 13-15절을 비유로 말한다면 이렇다. 그림이나 음악을 평가하는 일은 한 사람의 전문가가 다수의 비전문가보다 낫다. 동일한 음악을 들으면서도 누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은 시끄럽다고 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령한 일을 분별할 줄 아는 신령한 자가 되라: 아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먹는 것과 노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철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겠지만 누구의 철학이 더 심오한지 판단할 능력도 없음은 자명하다. 비슷한 이치로 영에 속한 일은 영에 속한 사람이라야 분별이 가능하다. 영적인 실력을 갖추라는 말이다.

13. 15절을 비유로 설명한다면, ‘전문 분야에 관한한(예컨대 바둑, 전쟁) 상수는 하수의 생각을 훤히 읽을 수 있다. 하수는 죽어도 상수의 생각을 읽어내지 못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신령한 자가 되라: 영에 속한 자는 육에 속한 사람에 비하면 몇 수 높은 상수인 셈이다. 도무지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상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에게 ‘무슨 낙으로 사느냐? 그렇게 하고 어떻게 사느냐?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느냐?’는 등의 질문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런 질문도 못 받는다면?

14. 16절의 첫 문장은 인용이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세상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도 가르칠 수도 없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다(=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세상의 지혜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설명하는 셈이다.

15. 2장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찾아보라.

    성부 하나님: 미리 정하심(7), 알지 못하게 하심(9),
    성자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히심(2, 8).
    성령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심(10-12), 가르치심(13).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피를 뿌리는 희생을 치르며 세워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너무나 분명하고 단순한 사실도 선조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삼위일체란 말은 후대에 생겨났지만 그 사상은 본장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16.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비교해보라.

    말뿐 아니라 능력도(4), 우리의 영광을 위한 것(7) ↔ 없어질 것(6), 영광의 주를 못박는 것(8).

17.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를 비료해보라.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함(8-9) ↔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짐(16)
    사람의 말로 가르침(13) ↔ 성령이 가르침(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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