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장 |
당시의 재판관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이므로 세상적인 지위가 아무리 높더라도 불의한 것이다. 같은 이치로, 세상 일이란 지극히 작은 일(2)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거나 속아줘도 될 만큼(7) 사소한 일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는 것, 교회가 욕을 먹는 것, 성도가 비난을 받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손실이다. 2. 법을 무시하고 막무가내식으로 덤비거나 빼앗더라도 법정에 고소하지 말라는 말인가? 불신자들이 교회를 향하여 불법을 행하는 경우와는 다른가? 너희 중에(1), 형제간 일(5),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6): 신자와 신자 간에 소송을 거는 경우에 한한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교회의 법으로 해결하지 못하거나 교회의 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국가의 법을 존중해야 한다. 3. 성도가 불신자들에게서 재판을 받는 것이 왜 부당한가? 온 세상을 심판해야 할 자(2)가 거꾸로 재판을 받느냐? 그런 것 하나 해결한 능력이 없느냐(2)? 천사도 판단해야 할 자(3)가 사람에게? 만약에 믿지 않는 재판장이 ‘배운 말씀대로 서로 양보하며, 서로 사랑하라’고 판결한다면 성도는 뭐가 되는가? 장차 왕노릇할 성도가(마 19:28, 눅 22:30, 벧전 2:9, 계 20:4) 이게 무슨 꼴인가? 우리네 조상들은 양반이라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배가 고파도 고픈 척 하지 않았다. 냉수마시고도 이를 쑤셨다나?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만물을 다스릴 자가 그 무슨 창피한 짓이냐? 하나님의 자녀로서 체면도 없느냐는 질책이다. 4. 고린도 교회가 법정에 들고간 문제는 바울이 보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다(2). 설마? 바울은 그것을 왜 작은 일이라고 하는 걸까? 장차 성도가 판단해야 할 온 세상(2)에 비한다면: 수동형으로된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이 말을 우리 식으로 고친다면 ‘너희가 세상을 판단할 것인데’ 가 된다. 온 세상을 심판할 자들이 그렇게 사소한 일조차 처리하지 못하느냐? 자격이 없나, 능력이 없나? 창피한 줄 알라는 것이다. 5. 2절의 ‘세상’과 3절의 ‘천사’는 짝을 이룬다. 어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다른 짝이 또 있는가? 뛰어남: 세상은 크고, 천사는 능력이 탁월하다(유대인들에게 천사는 하나님의 대리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로 인정되었다). 반면에 2절의 ‘지극히 작은 일’과 3절의 ‘세상 일’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점에서 또 다른 짝이다. 6.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4)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세상 법정의 재판관들: 2절의 불의한 자와 같다. 세상에서는 뛰어난 사람, 높은 사람들이지만 그런 사람들이라고 교회에서(하나님의 관점에서) 높임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자들에게 재판을 받으러 가느냐? 결국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은 지도자가 없는 것이다. 어른이 없는 곳은 씨끄럽기 마련이다(5). 7. 고린도 교회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5)? 지혜있는 자가 없었다(5):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 많았지만 모두가 순종하고 따를 만한 권위있는 지도자가 없었다. 세상 법정의 재판관보다 더 신뢰받을 만한 지도자가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권위주의는 나쁜 말이지만 권위가 없어서는 안된다. 권위는 힘이나 재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순종할 만한 것이 있어야 가능하다. 8.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이 한국의 법을 어기고도 한국의 재판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핑계야 좋다. 한국 법정이 법대로 공정하게 처리한다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작에 그런 짓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지! 그러면서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지한 나라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스러운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 정도의 염치도 없느냐고 묻는 셈이다. 부끄러운 줄 알라고 말하는 셈이다. 9. 그렇게 송사하면 누가 이길까? 둘 다 패배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7)란 말씀은 둘 다 패배자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명예를 다 저버렸으니 설령 송사에서 이긴다해도 더 큰 것을 잃어버린 셈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한다면 한 사람이라도 이기는 셈인데... 더구나 송사에서 진 사람과 같은 교회에서 한 형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 10. 교회 내에 분란이 일어나서 재산문제로 소송이 일어난다면 무조건 포기해야 하는가? 악한 의도로 고의적으로 소송을 제기하면? 포기해야 한다는 각오로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좋은 교회를 만들고 좋은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로 교단이 갈라진 예가 있으니(고소파, 반고소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예방이 최선이다. 정말 악한 자들이 악한 의도로 소송을 제기한다면 생각해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11. 정말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불의한 자들(9-10)이 있었을까? 이론상 그런 자들이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믿기 전에는 그럴 수 있지만(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는 그럴 수 없다. 엄마가 씻어준 옷도 함부로 버리면 미안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씻어준 옷을 어떻게 버릴 수 있느냐? 그러나 현재에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간혹 있더라. 안 믿는 사람이겠지? 12. 11절의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은 어떤 관계인가? 별개의 것인가, 동일한 것인가? 일련의(연속적인) 필연 관계: 별개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동일한 것도 아니다. 씻음으로 거룩하여지고, 거룩함으로 의롭게 되는 일련의 연속된 관계이다. 동일한 것은 아니라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씨가 자라서 싹이 나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는 경우와 비슷하다. 씨, 싹, 열매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별개의 것도 아니다. 13. 심판자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께 맡기고 성도는 법적인 문제로 싸우지 말아야 하나? 세상의 법정을 전적으로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최종적인 심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이 법으로 해결이 가능한 일도 있을 수 있다. 다만 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만능도 아니요, 최선도 아니라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한다. 부부간의 문제를 법으로 해결할 정도라면 부부관계는 깨진 셈이다. 이스라엘에도 모세 때부터 재판제도가 있었지만 로마의 법 제도와는 차이가 있었다. 로마의 법 제도가 자랑할 만큼 발달했지만 인간적인 지혜를 다투는 곳이었다면, 이스라엘의 재판제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었다. 14. 9-10절은 ‘불의한 짓을 하지 말라’는 권고이다. 그러면 12절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인가? 유익하지 않은 일이나 제재받을 만한 짓은 하지 마라: 불의를 넘어서 더욱 범위를 넓힌 셈이다. 한 걸음 더 나가면 덕을 세우는 일을 하라고 할 수 있다. 15. 5장에서 음행에 대해서 말하다가 6:12부터 또 음란에 대해서 7장까지 계속 이어간다. 그러면 중간에 소송문제가 왜 들어왔을까? 전혀 관계없는 얘길까, 아니면 일관성이 있는 것일까? 전혀 상관이 없다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소송을 제기하여 교회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 사람이나 음행을 저지르는 자가 동일한 인물이 아닐까? 16.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말은 내게 절대적인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이유없이 옆의 아이를 때리고는 ‘내 자유다’라고 장난치던 기억이 난다. 자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의 얘기다. 바울은 무엇을 자유라고 말하는 셈인가? 유익한 일이나 타인의 간섭을 초래하지 않을 일만 행하는 능력: 자유라는 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듯 성도의 자유도 유익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법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17. 음란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비유를 든 것이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는 말이다. 속담처럼 보이는 이 말을 음란한 짓을 행하는 자들이 무슨 뜻으로 사용했을까? 남자(의 성기)는 여자(의 성기)를 위해서,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있는 것 아니냐?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듯 성욕이 동하면 성행위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음행을 자연스런 행위로 여겼다. 이런 소리를 하면서 음란한 생활을 즐기는 자들에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하나님께서 폐하실 것이니 육체의 쾌락을 위해서 몸을 쓰지 말고 주를 위해서(영원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다(13). 18. 몸의 용도가 두 가지인 셈이다. 음란을 위해 쓸 수도 있고, 주를 위해서 쓸 수도 있다. 어디에 쓰는 것이 얼마나 유용할까? 음란을 위해서 쓰면 잠간 즐거울 수 있으나(건강이 유지되는 동안) 주를 위해서 쓰면 영원한 극락(시 43:4)을 누린다. 19. 주님이 몸을 위하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린데? 우리 몸이 주를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즉 우리 몸이 주를 섬기는 도구라면 주님께서 우리 몸을 돌보시는 것이 당연하다. 20. 음란한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지체로 만들었는데 그걸 창기의 지체로 만들 수는 없다(=성령의 전을 창기의 집으로 만들 수는 없다). 마치 전 재산을 주고 산 골동품을 엿하고 바꿔 먹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창기와 한 몸이 될 테냐(16), 주와 한 영이 될 테냐(17)? 21. 음행을 피해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보자(18-20) 음행은 일종의 자해행위이다: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짓이다. 자기 몸에게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일종의 자해행위이다.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짓이다. 22. 남자들은 신사복을 입었을 때와 군복을 입었을 때 하는 짓이 많이 다르다.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여기는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해결의 방편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어떤 존재로 여기라고 하는가? 세상을 판단할 자: 현실적으로는 초라해보일지 몰라도 신분상으로는 놀랍고도 고귀한 신분이다. 그 신분에 어울리게 살라는 것이다. 23. 음행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흔히 요셉의 예를 든다. 가능성조차 차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남자는 눈을 조심해야 하고(마 5:28, 삿 14:1), 여자는 마음을 조심해야 한단다. 남자는 눈이 가는 곳으로 마음이 따라가고, 여자는 마음이 가는 곳으로 몸이 따라 간단다. 음행 이전 단계에서 미리 차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