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1장


1. 미리 양해를 구하고 하려는 어리석은 짓이란 무엇인가? 왜 그러는가?

    자랑하는 것(11-12장): 그렇게 자랑하지 말라고 해놓고(3:1, 5:12, 10:12) 자랑하려면 쉽지 않다. 쓸데없이 자랑하는 놈들 때문에, 그런 인간을 참 사도인줄 믿고 따라가는 고린도 성도들 때문에 바울도 어쩔 수가 없다(12:11).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그렇게 어리석은 방법이 통한다. 이렇게라도 가르쳐야한다. 이것도 일종의 눈높이 교육이다.

2. 하나님의 열심이란 ‘반드시 성사시킨다’는 뜻이다(왕하 19:31, 사 9:7, 37:32). 이 말은 노력할뿐만 아니라, 그렇게 행할 능력도 있다는 뜻인데 문제는 바울에게 훼방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중매를 서는데(원어상 의미는 정혼한 사이) 처녀를 유혹하는 못된 인간이 있는 것과 같다. 단순히 열심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하나?

    두들겨 잡아야지, 아니면 처녀를 단단히 단속해야지: 도무지 필요없다던 자랑마저 동원해서 엄청나게 책망을 한다. 열심이란 말은 감정이 배제된 표현 쪽에 가까운데, 바울은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는가?’ 말이다. 열심에 이런 분노가 담기면 시기, 질투가 된다. 열심의 원어상 의미는 질투라는 의미다(NIV 참고).

3. 고린도의 성도들이 거짓 사도들의 말을 듣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와가 뱀의 말을 듣는 것(3, 창 3:13):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느냐? 너희가 또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는 엄청난 책망이다. 뱀이 하나님의 일을 망치듯, 거짓선지자들이 바울의 수고를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셈이다. 그러면 고린도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한다(3).

4. ‘이와’가 누구야? 하와를 가리키는 말 같은데?

    히브리어에서 바로 음역한 것이 ‘하와’, 이것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음역한 것이 ‘이와(=이브)’다(딤전 2:13).

5.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배우는 것이 욕이다. 좋은 말은 용을 써서 가르쳐도 잘 못 배우는데 욕은 왜 그렇게 잘 배울까? 우리 본성이 그 쪽에 더 가까워서 그런가? 바울이 애써 가르친 것보다 고린도 성도들이 더 쉽게 받아들인 것은 무엇인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4): 이미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정말 다른 예수를 전할 수 있을까? 멀쩡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하는 것이 먹혀들어가는 것을 보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전혀 다른 사람을 예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교회를 미혹하던 영지주의자들처럼 예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믿음으로만 아니라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정도 다른 것이 약간의 차이가 아니다. 이단(異端=끝이 다르다는 말)이란 뜻이다.

6. 자랑하지 않으려던 바울이 드디어 자랑하려고 일어섰다(5-). 이제부터 엄청난 자랑을 퍼붓는다. 이럴 때 경상도 사람들이 잘 쓰는 서두가 있는데?

    가마이 있으이 가마이때긴줄 아나?(=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때기인 줄 아느냐?):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경상도 사람도 이 정도되면 말이 많아진다.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던 11사도들에 비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시골 교회 목사가 ‘내가 이런 시골에 있는 것이 실력이 없어서 그런 줄 아느냐? 서울의 유명한 목사보다 못한 줄 아느냐?’ 이러면 어떻게 될까? 설령, 그 말이 맞다해도 그런 말을 해야하는 상황은 몹씨 마음이 아프다.

7. 사도 바울이 말에 졸하다고? 그렇지 않다고 할만한 다음 장면들을 참고해서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보자(행 13:15-41, 14:15-17, 17:22-31, 22:1-21, 24:10-21, 26:2-29).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이 미사려구를 동원하는 데는 바울보다 나았을 것이며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화려한 그들을 비꼬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설교자들은 온갖 재미난 예화와 위인들의 말로 설교를 화려하게 꾸며 속빈강정을 만들기도 한다. 아마도 이런 점을 염두에 둔 표현 아닐까? 더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린도 성도들이 그러면 안된다.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친히 겪어보지 않았느냐 알지 않느냐?’라는 것이다. 하긴, 눈에 뭐가 쒸면 뻔히 보고도 모른다.

8. 성도들을 위한 어떤 유명한 세미나가 성공한 이유 중 하나가 적지 않은 비용을 부담케했기 때문이란다. 무료로 봉사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한 복음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본문에서 찾는다면?

    다른 교회에서 값을 받았기 때문: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잘 해준 것도 죄냐?’는 말이다. 너희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다른 교회에서 지원을 받은 것은 너희를 위해서 그 교회 성도들에게 탈취한 셈이다(8). 말하자면 나는 너희를 키우기 위해서 못할 짓을 했다!

9.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정당한 권리를 포기했다. 이런 경우가 오늘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면 어떤 경우인지 예를 들어보자.

    전도하기 위해서 애매한 소리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변명하지 않는 것, 목회자가 정당한 사례를 요청하지 않는 것: 바보 소리 듣기 십상이지만 바울도 이렇게 바보짓을 했으니 우리도 따라가는 것이 정상 아닐까? 목표가 자신의 안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자가 되는 것이니 자신의 권리를 챙기려는 마음이 없을 수밖에! 헬라 사회에서는 가르치는 자가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보수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이런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었단다. 가격이 싸면 질이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10. 자랑을 하면서 ‘이 자랑을 말릴 자가 있으면 말려보라’고(=10) 하면 얼마나 얄미울까? 바울은 평소에 그렇게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얄미울 정도로 당당하게 자랑을 하고 있다. 그래도 괜찮은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을 위한 자랑이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11) 하는 자랑이다: 이렇게 자랑함으로 고린도 성도들의 신임을 받는 것이 결국은 성도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며 하나님 앞에서도 한 점 부끄러울 일이 없다. 나의 이 자랑이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11. 바울은 자신이 하는 것을 또 하겠단다. 그러면 기회를 찾는 자들의 기회가 끊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12). 뭘 계속 하겠다는 말이며 그러면 대적자들의 어떤 기회가 끊어진다는 말인가?

    사례받지 않는 일을 계속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사례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들이 더 당당하게 사례받을 기회가 끊어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우리와 같이 사례받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12. 바울은 대적자들을 ‘거짓 사도, 궤휼의 역군, 사단의 일군들’이라고 말한다. 너무 심한 말 아닌가?

    바울 개인의 원수가 아니다. 성도들에게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다. 뱀의 모습으로 하와를 유혹했던 바로 그 놈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절대로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다. 돈이나 물건을 훔쳐가는 도둑이나 강도에 비하면 영원한 생명을 훔쳐가는 자들이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13. 사기꾼이 오히려 더 말쑥한 법이다. 간첩이나 도둑이 표시를 내지 않는 것처럼 거짓 사도들도 티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의를 위하여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누구에게서 배운 수법인가?

    사단에게서(14): 사단이 이런 짓을 처음 행한 것이 아마도 하와를 유혹하던 때 아닐까? 현재는 뱀이 가장 징그러운 짐승이겠지만 그 당시의 하와에게는 가장 지혜로운(=간교한) 동물이었다. 실상은 사단이었지만.

14.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 하더니(1) 여기서는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16)고 한다. 왜 이렇게 왔다갔다 하나?

    자랑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자랑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어렵게 말을 꺼내려고 벼르는 상태다. 교회를 위해서 하기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내키지는 않는 일이고... 그런 아픔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15. 왔다가다 하다가 결국은 ‘나를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고 한다. 왜?

    어리석은 짓(=자랑)을 하겠다는 뜻이다(16, 18). 나를 어리석다고 그래라, 그래야 나도 마음놓고 자랑할 수 있지 않느냐? 드디어 본격적으로 자랑대결을 벌인다. 저 놈들이 저러니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목사가 자신의 수고를 일일이 알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도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해야 되는 상황이 안타까운 것이다. 맨날 놀고 있어도 ‘우리 목사님은 놀고 있어도 노는 것이 아니다’고 믿어주는 성도들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긴 노는 목사도 있긴 있더라.

16. 복음을 위해서 고생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바울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유를 17-18에서 찾아보자.

    주를 따름이 아니라 육체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라 희생하며 변명하지 않는 일에 익숙한 바울이 버린 지 오래된 세속적인 자랑거리를 다시 끄집어 내야하는 상황이 참으로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한글 개역)성경에 유일하게 사용된 말줄임표를 참고하자(고전 9:15).

17.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일(19)이 어떤 일일까?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다는 칭찬일까?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게 무슨 지혜냐는 비아냥이다: 고린도 성도들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랑한 모양인데 그것을 은근하게 책망하는 것이다. 너희는 결코 지혜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바보짓을 하게 된 것이다.

18.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치는데 어떻게 용납하는 수가 있을까(20)?

    잡아 먹히거나 뺨을 맞고 있는 것(교인들 앞에 권위를 내세우며 교인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19절의 속 뜻). 어떻게 그렇게 바보같은 짓을 하느냐? 여름 수련회 뒷풀이에서 어떤 분이 바다에서 다른 분을 지능적으로 물을 먹였다. 바닷물을 거푸 마신 사람은 자기를 건져주는 줄 알고 물 먹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모르니까 당하면서도 감사하더라! 이단이나 거짓 선지자에게 끌려가는 자들은 자신이 잡아 먹히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감사하며 끌려간다. 거짓 사도들에게는 이렇게 대하면서 정말로 관대하고 인내와 사랑으로 가득찬 바울에게는 완고하게 대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9. 21절을 의역한 다른 번역을 참고하면 ‘부끄럽게도 우리는 너무 약해서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겠다’는 의미다. 무엇이 그렇게 부끄럽다는 말인가?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행한 일: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치는 일(20), 다시 말하면 성도들을 상대로 담대하게 나서서 자기의 유익을 취하는 짓을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종처럼 성도를 섬기는 행위를 ‘약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강하고 담대한 자들이 거짓 사도임을 밝히는 셈이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강하고 담대한 목사들이 많던데...?

20. 바울은 정말로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일을 누군가가 한다니 그러면 자신도 용기를 좀 내 보겠단다. 그렇게 힘들게 용기를 내서 하려는 일이 무엇인가?

    자기 자랑(22-12:13): 이런 자랑을 해가면서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것이 바울에게는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받는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도 사도 바울의 헌신에 대해서 이만큼이나 알게 된 것이다. 자랑하는 것이 될까 싶어서 간증을 꺼리는 신실한 분들도 적지 않다. 자랑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간증을 하기는 해야한다. 정말 조심, 조심하면서 자랑도 좀 해야하는 모양이다. 아휴, 어려워!

21. 드디어 바울도 본격적으로 자랑을 시작한다. 맨 먼저 자랑한 내용은 자신의 혈통에 관한 것이다. 히브리인요,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라는 것이다. 이게 제일 큰 자랑거리인가?

    대적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주의자들이 로마 시민권자요 헬라 문화에 익숙한 바울의 혈통이나 국적 문제를 건드렸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22. 정신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23)?

    바울: 우리 말로는 주어가 분명치 않지만 원어상으로는 1인칭 단수, 즉 ‘나’ 다. 자신이 자랑하는 말, 즉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이 ‘정신 나간 사람이나 하는 말’로 여긴다는 뜻이다. 엄청난 수고를 했지만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정신 나간 짓이라고 하는 것이 바울이 얼마나 겸손하며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열정을 지녔는지 잘 보여준다.

23. 자랑거리가 그렇게 없나? 왜 이렇게 고생한 것만 자랑하는가(23-27)?

    개인적인 이익을 누리자고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거짓 사도라면 이런 생고생을 하겠느냐?

24.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다는데 왜 하필이면 39대를 때렸을까? 신 25:3을 참고해서 생각해보자. 한 대 봐준건가?

    혹시 잘못 헤아려 본의 아니게 40대를 넘길 것을 염려해서(만약 그렇게 되면 율법을 어긴 것이 된다) 그런 것이지 절대로 죄수를 불쌍히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25.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는 것과 세번 태장으로 맞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위험할까?

    세번 태장: 사십에 하나 감한 매는 유대인의 형벌이고 태장은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금지된 로마의 형벌이다. 죽을 수도 있는 잔혹한 형벌이었단다.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이 이런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불법적인 처사를 당하기도 했다는 말이다.

26. 바울이 돌에 맞은 기록은 행 14:19에 있다. 죽은 줄로 알고 갖다 버렸는데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했다. 그러면 세번 파선한 기록은 어디에 있을까?

    없다: 행 27장의 파선 기록은 지금보다 훨씬 후의 일이므로 여기 기록과는 상관이 없다. 이로 보건대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 많은 고난을 다 견디었음에 틀림없다. 말하지 않은 수고가 더 많지 않았겠는가! 위대한 사도, 바울이여!

27. 복음을 위해서 머나먼 나그네 길을 걷는 바울에게 위험하지 않은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위험한 요소들이 대조를 이루어 나타난다(26). 다음 구절들이 어떻게 대조가 되는지 생각해보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

    강도는 주로 산속에 있으니 강과 산이 대조를 이루는 셈이고, 시내는 작은 강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 도시를 뜻하는 말이다. 도무지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표현이다.

28. ‘춥고 배고프다’는 우리 말은 가장 불쌍한 경우를 가리킨다. 바울의 고생은 춥고 배고프다는 표현으로는 너무 약하다(27). 복음을 위해서 사는 자는 이래야 하나? 특히 목사는 다 이래야하는 것 아닌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스스로 버린 위대한 제자가 적지는 않지만 이것이 모든 전도자의 표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이런 짐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한국 교회가 예비 목회자들에게 사례를 제대로 책정하지 않는 것도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강요되거나 악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은 듯하다). 목사라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바울 사도의 말에서 답을 찾는다면 자신의 달란트대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다(고전 7:7). 그러나 복음을 위해서 어떤 고난도 감수할 수 있다는 기본정신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29. 장사라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모른다. 무슨 장사냐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가게를 준비하는 일, 물건을 구매, 분류, 배치, 재고정리하는 것, 천태만상의 손님을 상대하는 일, 현금관리, 직원관리... 사도바울 식으로 말한다면 장사에서 가장 힘드는 일이 무얼까?

    손님이 적은 것(오지 않는 것) = 교회를 위한 염려(28): 손님만 많다면 아무리 일이 많아도 견딜 수 있단다. 손님이 없으면 편하다고? 장사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의 말이다. 그게 가장 고통스럽단다. 바울은 육체에 가해지는 모든 아픔보다 교회에 염려스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다. 그렇게 고생한 것보다 그렇게 고생했다고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더 아프다.

30. 실족한(죄를 지은) 성도 앞에서 가장 사도다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애타하는 모습: 바울은 그런 성도에게 야단치고 책망하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함께 아파했다. 이런 약한 모습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30). 이런 태도가 바울을 더 위대한 사도로 만들었다.

31. 하기 싫은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지만 아무래도 바울은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덧붙인 말이 30절과 31절이다. 30절은 ‘내가 진정으로 자랑하고 싶은 것은 약한 점이다’는 뜻으로 이상의 것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31절은 무슨 의미로 덧붙였는가?

    나의 이 자랑이 거짓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셈이다. 요즈음에야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많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노라는 유대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부로 맹세하지는 않았다.

32.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도망친 얘기는 왜 하지? 이것도 자랑인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들려줄 사도가 된 첫 증거 아닐까? 이 고난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모든 고난이 시작되었다. 다메섹으로 갈 때만 해도 기세등등했는데 내가 왜 이렇게 되었겠느냐 말이다. 내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도 자랑이라면 자랑이다. 왜냐면 사도된 증거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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