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장


1. 고린도 교회에 인사를 하는 사람은 바울과 디모데이다. 그러나 이 짧은 인사말(1-2) 속에 하나님의 사역에 관하여 세 번이나 언급되었다. 바울이 보기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자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게 하신 분
    교회를 세우신 분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분

2. 고린도와 아가야 지방은 어떤 관계일까?

    경상북도와 대구?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아가야 지방에 복음이 전해졌다.

3. 문법 공부를 조금 해보자.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①의 하나님이시요 자비②의 아버지시요’에서 밑줄친 ‘의’는 역할이 어떻게 다른가?

    ①은 일반적인 소유격이다. ②은 서술적 소유격이라고 한다. 즉 자비가 가진 아버지가 아니라 자비로우신 아버지란 뜻이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식 어법에 본래 이런 표현이 있었는지 아니면 외국어의 이런 어법이 들어온 것인지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비의 아버지’보다는 ‘자비로우신 아버지’ ‘모든 위로의 아버지’보다는 ‘온전히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는 아버지’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소유인 교회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다른 이 소유의 교회도 있는가?

4. 바울의 가슴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펄펄 끓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아버지시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뿐이다. 무엇인가?

    찬송(3):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찬송뿐이다. 헌금도 찬송이어야 하고 전도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찬송이어야 한다. 예배도 찬송이어야 하고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어야 한다. 천국에 가서도 계속될 한 가지가 바로 이것이다.

5. 아내는 천식으로 10여 년간 고통을 겪었다. 처음 발병했을 때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살 준비를 하기도 했다. 정말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이제는 예전과 비교하면 거의 완치가 되었다싶을 정도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집사람 주변에 아픈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프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 집사람을 찾는다. 불신자처럼 결론을 내면 ‘어느 누구보다도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소질이 있는 모양이다’가 되겠지만 이런 경우에 바울은 어떻게 결론을 내는가?

    우리가 환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며 이로서 우리는 환난받는 자를 능히 위로할 수 있게 됩니다(4). →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심으로 우리도 남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도 못한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위로를 받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이유도 우리로 하여금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게 하려는 것이다.

6. 위로란 단어가 아주 많이 반복되고 있다. 3-7에 위로란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헤아려보자. 왜 이렇게 많이 나올까?

    10번, 환난 혹은 고난이 심하기 때문이다.

7. 혹시 고난을 당하게 되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위로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5): 사도들이 당하는 고난과 위로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아는 것은 상당한 유익이 있다. 동일한 고난을 당하게 되더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6).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간증(8-11) 아닐까?

8.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정도라면 거의 자포자기 수준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들에게 왜 이렇게까지 고난을 겪게 하시는가?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고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9). 이것이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위로다. 다른 그 무엇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아이가 자기 아버지의 위대함을 깨닫는 것은 자기의 형편과 무관하지 않다. 고래밥(과자)밖에 모르는 아이는 자기 아버지를 고래밥을 얼마든지 사줄 수 있는 부자(?)로 여긴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 위로를 받은 자는 그만큼 하나님의 위대하심(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위로의 크기가 다르다.

9. 아시아에서 당한 우리의 환란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함으로 우리를 도와달라(11). 그러면 그 기도를 통하여 은혜를 함께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10. 바울은 사람들, 특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대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들을 대할 때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잔꾀를 부리지 않고,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을 정도로 진심으로 대했다는 말이다.

11. 13절은 ‘이것만은 꼭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무엇이 염려스러워 이렇게 아쉬운 말을 하는 걸까?

    그리스도의 날까지 신앙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14): 고린도 교회에서 심지어 바울의 사도 자격에 대한 논란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대한 것까지 들먹인다(12). 바울의 마음을 온전하게 다 이해하지 못한다해도(14절의 ‘대강’)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가 나의 자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알지 않느냐는 것이다.

12.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읽어도 모르는 것은 쓰지 않았다는 말인가?

    바울의 편지에 다른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를 뜻할 뿐이다. 남의 말을 꼭 뒤집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아마 이런 저런 의도를 바탕에 깔고 이런 말을 하는 걸꺼야? 제발 그러지 말라는 뜻이다.

13. 고린도 교회에 가기로 예정했다가 변경하게 된 이유가 결코 무엇 때문은 아니라고 하는가(15-22)?

    경솔한 처신(17):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두번 방문할 계획이었고 고린도 교회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 계획이 바뀐 것에 대한 해명같다. 절대로 가볍게 처신한 것이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14. 고린도 교회가 안 보내주면 못 가는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연보한 것을 고린도 교회의 대표가 직접 가지고 가기를 바라는 것과 선교여행을 계속하기 위한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말이다.

15. 다음 표현을 현재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고쳐보자.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자기 유익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한 적이 있느냐? ‘예 하고 아니라 함’이란 ‘예’라고 하면서 동시에 혹은 금방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기의 유익에 따라 함부로 움직인 사람이 아니다. 미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18) 신실하게 행하였다고 고백한다. 감히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울이다. ‘예 예’ 했다는 것은 ‘예’ 했으면 반드시 ‘예’ 했지 ‘예’ 해놓고 ‘아니’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16.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신실하신 분(=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시니)이시다(19). 그걸 어떻게 믿지?

    바울과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가 함께 증언하는 것이니 믿을만하지 않겠는가? 표면상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반대다. 자신들의 말이 믿을만하다는 근거를 하나님의 미쁘심에서 찾는다(18).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실하심을 강조하는 것은 역으로 자신들도 그 분을 닮아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 강하다.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는 것은 예수는 신실한 응답을 하신다는 뜻이다. 참고로 이들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한 기사는 행 18:1-5에 있다.

17.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것과 우리가 아멘(=진실로 그러합니다. 혹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는 것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같은 의미이지만 주체가 다르다: ‘예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고 ‘아멘하는 것’은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응답(=믿음)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으니(=예가 되는 것)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아멘 하고 믿는 것이다.

18.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어떠한 오해도 갈등도 있을 수 없는 이유를 21-22절에서 찾아보자.

    하나님께서 견고케 하셨고, 기름을 부으셨고, 인을 치셨고, 성령을 주신 우리 사이에 어떻게 문제가 생길 수 있느냐? 못된 짓을 함께 한 사이일수록 친하다고 한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것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보다 더 친밀한 사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받은 우리 아니겠는가? 견고케 하심은 믿음에 대한 보증이고, 기름을 부으심은 사명을 주신 것이고, 인을 치신 것은 소유라는 표시이고, 성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보증이다. 같은 의미의 반복이다.

19. 많은 말로 변명하게 된 것(15-22)은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23) 때문이다. 고린도에 가지 않는 것이 어떻게 ‘너희를 아끼는 일’이 될까?

    급하게 고린도 교회로 가야할 문제가 교회에 있었는데 그렇게 갔더라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징계를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다음 기회로 미룸으로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준 셈이 되었다(2:1-6).

20. 사도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이면서 동시에 가슴이 따뜻한 목회자였다. 24절에는 목회자로서 바울의 어떤 점이 드러나는가?

    목회자는 주관자가 아니라 돕는 자: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 아니, 자칫하면 자연스럽게 군림하게 된다. 절대적인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성도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는 바울은 참으로 가슴이 따뜻한 목회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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