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6장 |
이 직책의 소중함과 그렇게 하여 하나님과 화목된 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역설함. 2.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된 일로 만들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이 준 선물도 버리거나 남에게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다. 하물며 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버려서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선물)를 헛되게 하는 것은 엄청난 죄악이다. 더구나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주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다. 3.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말은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인가? 더 이상 은혜가 없을 수도 있고, 구원을 얻지 못할 날이 있다: 그러니까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 결단하라는 말이다.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보자. 오라고 부를 때 회개하고 방주로 와야지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리 두들겨도 소용이 없다. 방주의 문을 닫으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노아가 열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문이 닫힌 후에는 열어달라고 해도 열리지 않았다(마 25:10-12). 4.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꼬임을 받아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기도 했지만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어떻게 증명하려고 애쓰는가(3-10)? 맡은 바 직책을 신실하게 지켰음을 강조함으로. 5. 바울에게 있어서 개인적인 억울함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억울하게 매를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모함을 받기도 했다. 모든 아픔을 참고 견디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3): 직책이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말한다. 개인적인 억울함이야 아무 문제가 아니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나를 가리켜 사도가 아니라고? 복음을 위하여 받은 수난이 자신의 사도권이 참되다는 증거다. 6. 대통령이 산하기관을 순시할 때 따라나선 대통령의 운전기사는 산하 기관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까? 하나님의 일군이라면 어떤 대접을 받아야 마땅할까? 최고의 대접을 받아야 옳을 것 같은데 사실은 최악의 고통을 스스로 겪었다: 권력자 주변 사람들의 한 마디는 영향력이 참으로 크다. 그래서 단순히 운전기사라고 해서 무시하면 큰 일이 난다. 그래서 칙사대접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군은 그런 권력자의 주변 인물이 아니다.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까지 희생시키신 하나님의 일군은 자신도 그런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끗발있는 부대장을 모셔야 자신도 끗발이 좀 센 법인데...? 7. 바울은 3:1에서 자천(自薦)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자천하는가(4)? 3:1의 자천은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거나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을 내세울 생각이 없다는 말이고 여기서 자천은 복음을 위해서 어떤 고난이라도 참고 견디었다는 의미이므로 같은 맥락이다. 8. 4-10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대강 1)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처한 환경(상황), 2)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도구, 3) 그렇게 노력한 결과로 분류해보자. 1) 많이 견디어야 하는 상황: 환난과 궁핍과 곤난(=심적인 부담)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외부에서 가해지는 육체적인 괴로움)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스스로 짊어진 육체의 짐, 교회에 재정적인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복음 전한 것). 9. 하나될어야 할 자와 하나되고 분리되어야 할 자와는 분리되어야 한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되어야 할 자는 누구이며, 분리되어야 할 자는 누구인가? 하나가 되어야 할 자는 고린도 성도들과 바울이다(11-13). 분리되어야 할 자는 믿지 않는 자들이다(14-18). 10.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의 사이가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 누구 탓인가? 누가 먼저 풀어야 하는가? 고린도 성도들이 마음이 좁아진 탓이다. 그럼에도 사도가 먼저(13절,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혔다. 어른이 먼저 풀어야지! 아니 먼저 푸는 사람이 어른이다. 우리의 입이 열렸다(11)는 것은 ‘삐쳐서 말 않고 있는 것과 반대 개념’ 아닐까? 어떤 역본은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다’고 의역을 했다. 11.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란 말은 너희가 좁아졌다는 말인가, 우리가 좁아졌다는 말인가? 우리가: 그러니까 12절은 ‘우리가’ 좁아진 것이 아니니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하는 것이다. 12. 느닷없이 믿지 않는 자와의 관계에 대한 얘기가 왜 튀어나왔을까? 믿음에 손실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경에서: 바울이 이토록 어렵게 복음을 전해서 적지 않은 열매을 얻었는데 이것이 허사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의 노력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노력마저 헛수고가 될 수는 없다는 안타까움 탓이다. 13. 우리나라의 멍에는 소 한 마리가 매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멍에는 두 마리가 매는 것이다(신 22:10). 두 마리의 힘이 어울리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은 사귀지 말라는 말인가? 고전 5:9-10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믿지 않는 자와 밀접한 관계(친밀한 교제, 동업, 결혼)를 맺음으로 믿음에 손상을 가져오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14. 성도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때 성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그러니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어두운 가운데서 빛을 발하는 삶이어야 한다. 아예 어두움을 떠나 빛이 있는 곳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17절에서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라는 말씀은 사 52:11의 인용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떠날 준비를 하라는 내용이다. 무조건 속세를 떠나라거나 믿지 않는 자들과 완전히 갈라서라는 말이기보다는 그들과 함께 하거나 그들 밑에서 영향을 받지 말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15. 성도가 구별되어야 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본문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18): 애비없는 자식처럼 함부로 살아서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해서는 안된다. 7:1절을 분리시키지 말고 18절에 붙이는 것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