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7장 |
6:14-18,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약속: 애비없는 자식처럼 함부로 살 것이 아니라 자식이라면 훌륭한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레 19:2)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절은 차라리 1장의 말미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아보인다. 2. 구약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신약의 성도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종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1번에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성도의 경건한 삶의 바탕이 된다. 아버지와 아무리 친하게 지낸다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경외심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3.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2)는 말은 6장의 어느 말과 맥이 닿아 있는가? 6:13절의 ‘마음을 넓히라’: 같은 말이라고 보아야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해도 될만큼 사이가 회복된 모양이다. 엄청난 마음 고생을 겪은 다음에 하는 말이다. 4.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는 말을 하는 것은 찔리는 데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바울을 비난한 거짓 사도들이 한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바울은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처절한(?) 자기변명을 해야 했다. 작금의 한국교회에는 신천지의 추수꾼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온갖 약점을 잡고 목사나 장로를 꼼짝 못하게 하기도 한단다. 어떤 적대자들에게도 약점이 없는 삶이 되어야 한다. 5.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따진다면 이것은 정죄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식으로 따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자신에게 잘못이 없음을 강조하는가(2)? 하나되기 위함이다(3): 함께 죽고 함께 살려고 그러는 것이다. 바울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울의 가르침을 인정하는 것이고,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즉 살 길이다. 자신을 비난하는 것에 동조한 성도들을 정죄할 마음이 전혀 없다. 전에도 말했단다(6:11-13, 관주를 참고할 것). 교회의 권징은 바로 이런 정신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살리기 위함이다. 6. ‘말이 담대하다’는 것은 숨김없이 다 말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역본들은 ‘신뢰하다’로 번역을 하였을까? 믿지 못하면 모든 사실을 다 털어 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의역을 한 것이다. 고린도 교회가 일시적으로나마 바울을 신뢰하지 못하고 엄청난 고통을 주었지만 바울은 그들을 믿었고, 결국은 그 믿음이 옳았음을 확인하고(5-7)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라고 감사하였다. 7. 바울이 마게도냐에 간 것이 한 두번이 아닌데?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치유하기 위해서 보냈던 디도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 없어서 그를 만나려고 간 일(2:12-13). 8.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어떻게 육체가 편하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안에 있는 두려움’은 위대한 사도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 아닌가(5)? 고린도 교회를 향한 염려를 가리키는 말이다: 선교사라고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그런 외부의 일로 인한 두려움이 아니다. 9.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만사형통과 어떻게 다른가? 환난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게 하는 위로(5-7): 일반적으로 쓰이는 만사형통이란 개념은 외부의 변화에 초점이 있으나 하나님의 위로는 성도의 내부의 변화에 초점이 있다. 이것을 잘 표현한 복음송 가사를 음미해보라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10. 디도가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는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서 받은 위로, 즉 사모함과 애통함과 바울을 위한 열심 있는 것이다. 염려하던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교회를 위해서 걱정하느라고 밤잠을 자지 못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런 기쁨을 알 것이다. 11. 아마도 바울은 몹씨 강경한 톤으로 편지를 썼던 모양이다. 소위 ‘눈물의 편지’(고후 2:4), 혹은 ‘준엄한 편지’라고 불리워지는 이 편지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그 편지를 디도 편에 보내놓고 후회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편지를 받고 고린도 성도들이 고통스러워할까 싶어서: 마음 약한 선생님이(부모가) 독한 마음을 먹고 매를 들고나면 자신이 더 아프다. 아이는 맞은 사실도 다 잊어버렸지만 선생님은(부모는) 잊지 못한다. 사랑하는 경우에 한해서! 그랬는데 그 결과가 아주 좋아져버렸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이다. 12.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잠시나마 근심하게 한 것은 누구인가? 당연히 바울? 바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9). 교회를 염려한 것은 바울이었고 편지를 쓴 것도 바울이지만 이런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도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읽을 줄 아는 것이 바울의 가장 큰 능력이다. 13. 스트레스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란다. 치명적인 해를 주는 스트레스도 있지만 적절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삶의 활력이 되기도 한단다. 근심도 그렇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고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다(10).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결국은 복이다. 라합이나 출애굽 당시의 산파들처럼! 14. 고린도 성도들이 근심한 결과로 나타난 7가지 현상(11)을 다음의 예처럼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예) 간절하게 함: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바로 고치려는 열심. 변명하게 함: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것), 15. 바울이 엄하게 책망하는 편지를 보낸 이유가 불의를 행한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누구를 위해서 썼는가? 사도를 향한 간절함이 있는 자(12): 잠시 정신이 없어서 엉뚱한 짓을 했던 성도들을 위해서 썼다는 뜻이다. 이전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대적자와 싸울 때 적극적으로 바울의 편을 들지 않았던 고약한(?)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부드러운 표현을 쓰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서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교회를 핍박하던 패기찬 모습은 어디 가고? 16. 디도를 만난 바울의 기쁨은 두 가지다. 고린도 성도들이 편지를 받고 보여준 태도와 디도의 기쁨이다. 디도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바울이 더욱 기뻐한 이유가 무엇일까? 디도에게 준엄한 편지를 줘서 보낼 때 디도는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13b 참조). 위대한 사도 바울도 마음이 몹씨 상해서 돌아온 교회에 자기가 간다고 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걱정스런 마음으로 갔다가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안심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17. 바울은 디도를 보내면서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말을 했는가? 자랑(14): 심하게 책망하는 글을 써보내면서도 고린도 성도들을 자랑했다. 사고를 쳤지만 그래도 믿을만 하다는 식으로! 막상 디도가 고린도에서 박대를 받고 쫓겨났다면 바울의 체면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문제를 일으켰지만 끝까지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부모같은 목회자의 자세다. 18. 디도는 바울의 심부름으로 고린도에 가긴 갔지만 가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바울마저 실망시킨 저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까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있었을 것이다. 막상 도착했더니?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하였다(15): 고린도 성도들이 여전히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고 디도를 바울의 대리인으로 영접한 것이다. 디도가 많이 놀랐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대한 애정이 더욱 깊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심정 = 애정). 19. 디도가 어떤 소식을 가지고 돌아올지 안절부절하고 있었던 바울은 디도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소심하게 걱정하던 바울이 드디어 ‘범사에 담대’해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걱정할 필요없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런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