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 장


1.
옛날 우체부는 참 피곤했겠다. 사람들이 주소를 제대로 쓰지 않았을 것 같다.
고넬료의 하인들이 찾아 가야하는 집의 주소는 무엇인가?

    해변에 있는 피장 시몬의 집

2. 우리는 기도하러 어디로 가는가? 베드로는?

    나름대로의 특정한 곳이 있으면 좋겠다. 교회 아니라도, 다락방, 서재, 소파......
    베드로는 지붕; 원래 지붕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넓직한 곳이었다. 곡식을 널기도 하고 기도처로 사용하기도 하고

3. 베드로가 본 것은 보자기였을까 그릇이었을까?

    보자기같이 생긴 그릇

4.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대답은 이방인에게까지 복음 전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범위를 좁혀서 베드로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내용상 차이는 없지만 답은 조금 달라진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 속에 정답이 있기 때문이다.
    즉 15절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이다(28).

5. 예수님께서 분명히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마28:19)'라고 명하셨음에도 이방인에게 복음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상태에서 베드로를 통하여 이런 환상을 보게 하시는 것은 단순하게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청각 교육을 시키시는 것이다. 귀로만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훨씬 더 확실한 것이다. 그래서 영어를 외울 때도 손으로 쓰면서 입으로 크게 말하면서 외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설명이 잘 된 것 같은가? 뭔가 빠진 것이 하나 있는 데 무엇일까? 같은 질문을 다시 해보자. 이 환상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 뭔가 빠진 것이 있다. 한 어절만 보충해 보자.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다져두기 위하여 이 환상을 보여주셨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되 반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다져두기 위하여 세 번이나 이 환상을 보여주셨다'

6. 이 환상을 본 베드로를 보면서 어떤 생각 혹은 느낌이 드는가?
나도 이런 환상을 한 번 체험했으면 싶어요? 그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을 것 같은 데......

    복음이 이방으로 향하고 드디어 우리에게까지 전하여진 것은 베드로를 위시한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이다. 중간의 전도자나 선교사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이어서 더욱 감사하다.

7. 땅에 있는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을 왜 속되고 깨끗치 않은 것이라고 하는가?

    베드로의 말이 전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아마 유대인들이 깨끗치 않은 것이라고 하는 것들과 정한 것들이 분간없이 뒤섞여 있었을 것 같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은 구별이 없다. 학교, 학벌, 지방, ......... 따위로 구별하는 짓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8. 너무 흔한 이름도 참 불편하다. 한 교실에 같은 이름이 둘 있으면 주로 '큰∼, 작은∼'라 하고, 교회에서는 주로 이름 뒤에 영어 알파벳을 붙이던 데 여기 본문에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바닷가 피장 시몬(5-6, 17-18, 32)

9. 이건 불만이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으면 베드로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내버려 두셔야지 또 그 의미를 설명해 주는 것(20)은 지나치다. 좀 재미없는 일이다. 성령께서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푸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 그만큼 베드로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말이다.

10. 너무나 쉬운 환상인 것 같은 데 베드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상상이 안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이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생각되는 최초의 행동은 무엇인가?

    이방인을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는 것(22);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사람 취급을 않았던 유대인들은 이런 행위에 대하여 몹시 비난함(10:28, 11:1-3 ←신7:1-4)

11. 고넬료가 세 사람을 보냈는 데 천사는 왜 두 사람이라고 하는가?

    두 사람의 임무는 고넬료의 심부름, 또 한 사람은 아마 호위병 아닐까? 그래서 계산에서 뺄 수도 있다. 버스 기사에게 몇 사람이 탔느냐고 물어보면 요금을 내지 않는 사람 가령, 안내양, 자기, 공짜 손님 등은 사람 수에 넣지 않는다.

12. 베드로를 찾아온 고넬료의 하인들이 꽤 건방지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데 '너'라니? 어떻게 혼내지?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

13. 고넬료는 경건한 유대인보다 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같았다. 사도 베드로는 만나는 장면에서 그를 칭찬해 보자.

    1) 사회적 신분으로 치자면 베드로보다 월등히 높은 사람임에도 그에게 엎드려 절한 점; 식민지를 다스리는 나라의 장교, 나도 사람이라는 베드로의 말을 보면 신처럼 떠받들었다는 느낌
    1) 온 가족과 친지들을 다 모아놓고 기다린 점
    1) 겸손하게 말씀을 듣고자 함

14. 재미 삼아 이런 생각도 해 보자. 머리 훈련도 시킬 겸. 하인들이나 베드로가 목적지에 이튿날(9, 24, 단 23절은 아님) 들어갔으면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거리가 얼마일까? 나흘 전(30)이라 하는 걸로 봐서 왕복에 나흘이 걸린 셈인데...... 한 가지 더 고려할 점은 고넬료가 하인들을 보낸 시간과 도착시간도 대략은 짐작할 수 있는 데 하인들이 걸린 시간과 베드로의 일행이 걸린 시간은 다소 차이가 있다. (참고로 하인들이 출발한 시간과 도착시간, 베드로의 도착시간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기도시간과 관련이 있고 여기에 나오는 시간에 6시간을 더하면 우리 시간과 같다)

    하인들은 고넬료의 기도시간인 오후 세시 이 후에 출발하여 베드로의 기도시간(정오) 끝 무렵에 도착했다. 베드로는 아침에 출발하여 고넬료가 처음에 계시를 보았던 그 시간쯤에(30절의 이맘때)에 도착했다. 하인들처럼 잘 걸으면 하루가 안 걸리고 베드로처럼 많은 일행이 걸으면 하루를 조금 넘기는 정도의 거리 같다. 우리나라의 작은 도시들은 대략 80리(약 30km) 거리에 있다. 옛날에 사람이 하루 동안 걸으면 적당한 거리에 마을이 선 탓이 아닐까? 최대한 60km는 넘지 않으며 30km는 넘는 거리이다. 실제로는 약 50km라고 한다. (이런 문제는 가장 근사치를 낸 사람을 정답으로 하거나 오차의 범위를 미리 적당하게 설정하고 그 범위 내에 든 사람을 전부 정답으로 하는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15. 고넬료는 베드로라하는 시몬을 불렀지만 그는 시몬을 만나려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 시몬이 찾아왔지만 그 시몬의 말을 들으려고 시몬을 만난 것이 아니다. 고넬료는 누구의 말을 들을려고 누구 앞에 있다고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함(33); 설교는 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목사의 개인의 생각이나 철학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고 설교를 듣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자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주일날 교회에서만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16. 34절에 베드로가 말을 하기 전에 입을 열었단다. 누군 입도 안 열고 말하나? 그러고 보니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가르치실 때 입을 열어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다(마5:2). 너무나 당연한 말을 왜 하지?

    중대한 발언을 하고자 할 때 사용한 유대인들의 관용적인 표현 (마5:2, 13:35, 행8:35, 18:14)

17. 고넬료를 선택하신 하나님에게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34)'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좀 이상하다. 베드로의 생각대로 한다면 만약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 것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 되는가?

    유대인이라면(=외모에 지나지 않는다) 무조건 자녀로 삼는 것(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생각); 비록 이방인이지만(=외모는 시원찮다는 뜻)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8.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한 설교(37-43)를 베드로 자신이 요약한 표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________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35-38,40,4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화평(36)을 이루셨습니다(롬5:10); 37절 처음에 '곧'이라는 단어가 36절과 37-43이 같은 내용임을 밝히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즉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을 압축한 설교인 셈인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설교가 이 범주에서 멀어지면 안된다.

19. 교회에 다닌다고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내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 지를 알고 믿을 때에야 비로소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부지런히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생각이 전혀 변하지 않은 이런 신자를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본문에서 그럴 때 사용하기 좋은 표현을 하나 찾아보자.

    할례받은 신자들(45); 여전히 옛 구습을 버리지 못한 신자들? 생각까지는 변하지 않은 사람들, 고넬료의 집까지 따라왔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이럴 수가? 그 당시의 신자들은 전부 할례를 이미 받은 사람들이었을 텐데 유독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아직도 율법적인 사람들이란 뜻일 것이다.

20.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안되는 데 목사님을 불러서 정식으로 세례를 받게 할 시간이 없을 때는 아무라도 물 대신 침을 뱉어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면 아무래도 인간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세례가 사람의 구원을 좌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례는 단지 하나의 표시요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면 세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본문의 사건을 인용하여 설명해 보자.

    성령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표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녀로 인 치셨다는 말이다.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뒤늦게 베푸는 세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일 수가 없다. 단지 그 사실을 기념하는 것일 뿐이다.

    이달리야대; 당시 가이사랴에는 5대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 데 4대는 본토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달리야대만 로마인 6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이사랴에 있었던 총독을 보호하는 부대였던 것 같다.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