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0장 |
하나님: 보좌 형상이 다시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친히 계시를 주셨다는 뜻이다. 2. 가는 베옷 입은 사람의 맡은 일이 9장에서는 무엇이었는가(9:2-3, 11)? 그런데 지금은? 심판을 당하지 않을 자의 이마에 표하는 일, 여기서는 숯불로 사르는 일: 하나님께서 하라시면 구원도 행하고 심판도 행하고...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천사의 사명이다. 3. 바퀴 속에 웬 숯불이? 안 뜨겁나? 손으로 가득히 움켜 잡아도 괜찮게? 뜨겁지 않은 불이 어떻게 예루살렘을 태울 수 있을까? 그런 의문점은 이 메시지의 핵심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심판이 예루살렘 성에 임한다는 점이다: 굳이 대답을 해야 한다면 ‘바퀴 속의 숯불’은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숯불이란 뜻이고, ‘안 뜨거운 숯불’이야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았던 모세의 불(출 3:2)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천사의 손을 태우지는 않으나 예루살렘 성읍은 완전히 불태울 수 있는 숯불은 대상을 선별적으로 불태운 하나님의 불(레 10:2, 5)이다. 4. 불이 다른 곳에는 없나? 그룹과 바퀴 사이에 있는 불이어야 하는가? 하나님만이 심판을 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판의 불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와야 한다. 5. 왕이 행차하면 혼자 조용히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행차는 어떠한가? 뜰에 가득한 구름, 영화로운 광채(=무지개 형상 1:28), 그룹들의 날개 소리: 곧 성전을 떠나실 하나님이시지만 성전에 임하셔서 심판을 명하시는 모습은 여전히 영광스런 모습이다. 우상과 대조적으로 위엄에 가득찬 모습으로 심판을 명하신다. 이스라엘이 이런 하나님을 버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우상을 섬겼으니... 6.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는데 이들을 심판하시는 명령에 천사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순종한다. 가는 베옷 입은 자, 불을 내주는 그룹, 날개 밑의 손. 선택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이 되고 싶은가? 하나님의 백성: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징계를 받기는 해도, 하나님께서 천사보다 더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천사보다 더 잘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돼야지! 7. 9-10절은 1:15-16과 같은 내용이다. 무슨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어떤 모습에 가장 눈이 끌리는가? 차이: 생물 ↔ 그룹(케루빔), 곁 땅 위 ↔ 곁: 결과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8. 네 그룹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려보자. 각자 따로 따로 움직이는가, 아니면 한꺼번에 움직이는가(11)? 한꺼번에, 방향을 바꾸지 않고, 자기 방향으로 똑바로: 한 그룹이 앞으로 가기를 원하면 다른 세 그룹은 그대로 따라간다는 말이다. 일을 맡은 사람이 앞장서면 다른 이는 그대로 따라주는 형국이다. 뜻이나 의견이 다르면 어떻게 되나? 그런 일은 없다! 9. 머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려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이 그룹들에겐 없을까?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는 것(12)은 온 몸과 지체가 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함을 의미한다: 12절을 참고하면 그룹과 바퀴는 분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머리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지체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다. 10. 바퀴를 가리키는 두 종류의 말이 사용되었다. 6절의 ‘바퀴들’은 ‘라갈갈’이고 ‘바퀴’는 ‘오판’(복수형은 오페님)이다. 13절에서 ‘바퀴들’은 ‘오페님’(‘오판’의 복수형)이고, ‘도는 것’은 ‘하갈갈’이다(←어원은 ‘가랄’). ‘라갈갈’이나 ‘오페님’이 구분되지 않고 쓰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설명을 듣노라면 떠오르는 지명이 있는가? 길갈: 광야의 40년 방황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 입성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곳이다. 전쟁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우선임을 가르쳐 주셨다. 거기서 그들이 행한 할례는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했다’는 뜻이다(수 5:9). 굴러가다 ‘가랄’에서 나온 지명이다. 11. 그룹(케루빔)은 사방의 얼굴이 다르다. 14절은 1:10의 반복인데 무슨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보자. 소의 얼굴을 그룹의 첫 면이라고 한 점과 바라보는 방향과 소개하는 순서가 다르다: 그룹의 얼굴이 소라는 것은 그룹이 아무리 충성스럽게 봉사한다고 해도 사람만큼 귀한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다. 얼굴의 순서가 다른 것은 에스겔이 위치를 옮겨서 본 것과 소개하는 순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1장에서는 앞우좌뒤(동남북서, ੨, 앞은 사람, 우편은 사자, 좌편은 소, 뒤는 독수리) 순서이었는데 여기서는 회전(남동북서, ↺, 첫 면은 그룹의 얼굴, 둘째 면은 사람, 세째는 사자, 네째는 독수리)하는 방식이다. 네 가지 생물은 각 영역의 우두머리로 지혜, 용맹, 성실, 민첩함 등을 상징하는 셈이다. 12. 그룹들이 왜 올라가지? 하나님께서 떠나신다는 뜻이다(18):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께서 떠나신다. 하나님 곁에서 수종드는 그룹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움직임을 짐작할 수 있다. 13. 그룹과 바퀴의 움직임은 1:19-21에 묘사된대로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혼연일체, 일사불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일 아닐까?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할텐데... 14. 드디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신다. 성소에서 성전 문지방으로, 다시 동문으로! 이걸 바라보는 에스겔 선지자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아무런 내색도 않았을까? 다만, 천천히 떠나시는 것이 그래도 위안이 된다. 돌아오시겠지(43:1-9)! 15. 1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해놓고 왜 또 반복할까? 장소가 바뀌었잖아! 그발 강가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이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나시는 분이나 같은 분이더라는 생각 때문 아닐까? 이전에 성전에서 떠나신 그 분이 하늘나라 먼 곳으로 영영 가버리시지 않고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지금 그발 강가에 계시더라는 것은 엄청난 위로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선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