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2장 |
너와 함께 거하는 자들은 패역한 족속이로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의 심판을 믿지 않고 경시하는 자에 대한 경고이다. 2.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능력이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이런 태도를 무엇이라고 할까? 패역: 인륜에 어긋나는 것이 패역인데 이것이 커지면 반역이 된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도 패역이라고 하면 될까? 반역보다 더 큰 죄인데? 패역이란 단어로는 아무래도 약하지만 그 이상을 표현할 단어가 없어서 패역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감사한 일이다. 3. 에스겔이 이사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뭐라고 물을까? 그러면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참고, 여기서 ‘이사하다’고 번역한 단어는 ‘끌려가다’는 뜻이고, ‘성벽’은 일반적으로 집이나 침실의 ‘벽’을 가리킨다). 질문: 왜 이사하는데? 왜 밤에 이사를 해? 아니, 왜 벽을 뚫고 포로처럼 나가? 4.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않으면(6) 어떻게 이동할 수 있나? 아마 넘어지고 엎어지겠지: 그러면서도 계속 그렇게 이동하라는 말이다. 자발적이거나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상황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하셨다. 행구를 메고 가다가 넘어지면? ... 끌려가는 포로가 넘어지고 자빠지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5.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정상인가? 비정상: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것이다. 선지자의 삶은 도대체 무엇이 되는가? 선지자에게 자신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목사나 선교사도 그래야하는가? 모든 성도는 그럴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6. 환상을 보여주고 친히 해설까지 다 하는 것(10-15)은 드문 일이다.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의미를 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친절하실까? 이렇게 명백한 비유마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선지자들이 그렇게 외쳐도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해 하고 계시는지 잘 보여준다. 7. 예루살렘 왕(시드기야)과 그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이 당할 일을 바벨론에 포로로 온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벨론에서 속히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집을 짓고 살라고 예레미야가 편지를 보낸 일과 관련지어보자(렘 29:1-23). 포로로 잡혀온 자신들보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이 더 복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이 잘못임을 지적하는 셈이다: 예루살렘에 남아서 여전히 패역한 자들은 자신들보다 더 험한 일을 겪게 될 것이다. 8. 이사를 밤중에 하는 이유를 12-14절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몰래 도망치는 행위를 상징함: 훗날 시드기야가 밤중에 군대를 이끌고 도망치다가 추격해오는 바벨론 군사에게 사로잡힌다(왕하 25:1-6). 현실적으로는 바벨론 군사가 그를 추격하지만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물을 치고 칼을 빼들고 따라오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보이는 군대만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9. 12절의 땅과 13절의 땅은 다른가? 같다: 안 보려든 땅을 결국은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후일 시드기야는 사로잡혀 두 눈을 뽑힌채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다시는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한다. 10. 이스라엘이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단 하나 있다면? 여호와를 알지 못함(15): 이런 고난을 당하기 전에 알아야지.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이런 비극을 막는 최선의 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작에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이런 비극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한다. 11. 왕의 최후가 이렇게 비참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도 괜찮을까? 예레미야는 엄청난 고난을 받았는데? 바벨론에 이미 포로로 잡혀간 상태에서의 예언이니 이스라엘의 왕이 어쩌겠는가? 12. 하나님은 징계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일부를 남겨서 약속을 완수하기 위한 통로로 삼으셨다.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말한 남은 자, 거룩한 그루터기가 바로 그런 예이다. 에스겔이 말하는 남은 자는 역할이 좀 다르네? 자신들이 얼마나 가증한 짓을 했는지 이방인에게 증언하게 함(16): 단순하게 살아남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의 정당함을 증거해야 한다. 13. 떨면서 식물을 먹고 놀라고 근심하면서 물을 마시는 게 어떤 모습인가? 일종의 연기를 해야 하는 셈: 덜덜 떨면서 음식을 먹으면서 흘리기도 하고, 쏟기도 해야 한다. 선지자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온갖 연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참 힘들겠다! 14. 이스라엘이 떨면서 식물(食物)을 먹고 놀라고 근심하면서 물을 마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땅이 황무하게 됨(19):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양식이 떨어짐을 의미하기보다는 외적의 침입을 가리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이렇게 황무해진 것은 이스라엘의 패역 때문이다. 꼭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되나? 15.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은 더디고 느리게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22).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하긴 오늘날에도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하시지 않더라는 생각을 가진 성도들이 적지 않다.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에 대한) 말씀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렘 5:12, 17:15): 오래 참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성품(롬 2:4-5, 벧후 3:8-9, 렘 15:15)이 때로는 이렇게 오해를 받기도 한다. 지금도 백성들의 입맛에 맞는 말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나 점쟁이들은 쉽게, 즉시 답변을 준다. 이것이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다(24).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기도 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그 분을 신뢰하며 한 걸음씩 걸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아들, 땅)이 얼마나 더디게 이루어졌는지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한 평생 나그네처럼 살았던 그 분을 믿음의 조상으로 믿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자. 16. 하나님은 왜 선지자에게 거듭 거듭(1, 8, 17, 21, 26) 묵시를 보여주실 뿐 아니라 속히 응할 것이라(28)고 하실까? 답답한 탓에 체면 불구하고 말씀하신다: 점잖은 분이 일마다 친히 나서서 간섭할 때는 많이 다급해진 셈이다. 이제는 느긋하게 기다릴 여유도 없다.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심판을 행하겠다는 선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