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3장 |
그렇다: 구약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도 선지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인가? 신약에는 거짓 선지자라는 표현이 더러 나오지만 구약에서는 유일하게 슥 13:2에 한 번 나온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선지자가 거짓을 말한다’는 식이다(왕상 22:22, 사 9:15, 렘 14:14). 선지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질책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직분보다는 무슨 말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뜻 아닐까? 자기 스스로 선지자라고 하는 자, 선지자도 아닌 자를 굳이 거짓 선지자라고 하지 않는 것은 이들이 벌을 받을 때는 더 엄중한 벌을 받게 된다는 뜻도 된다. 자칭 목사나, 엉터리 목사도 심판 날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2. 오늘날에도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3)가 있을까? 설교 시간에 성경책을 펴놓고 성경과는 상관없는 설교라기보다는 연설이나 강연을 하는 목사가 그런 경우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 때로는 고약한 의도를 가지고 성도를 위협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3. 여우는 교활하고 음험하게 잔꾀만 부리는 인간을 가리킨다. 포도원을 허는 여우를 잡으라는 말씀(아 2:15)이나, 예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신 것(눅 13:31-32)도 그런 의미이다. 13장 전체를 요약해서 본다면 도대체 선지자들이 무얼 어떻게 했길래 여우라고 부르는 걸까? 하나님을 팔아서 자기 유익을 노렸기 때문: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말을 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계시를 주셨다고 하는 걸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다. 4. 선지자가 왜 전쟁을 방비하고 성을 수축해야 하는가? 영적으로 그래야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전쟁을 방비하고 성을 수축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비유)로, 하나님을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여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사탄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성을 수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5.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이기에 전쟁을 방비해야(5) 하는가? 심판의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해야 하는데 도대체 무얼하고 있느냔 말이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하나님을 잘 섬기던 사람들에게는 복이 임하겠지만 배역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임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날은 축복의 날이기도 하고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을 책망하실 때에 하나님의 날을 많이 언급했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의 날은 대부분 심판의 날이다. 6. 거짓 선지자들도 뭔가 본 것이 있으니 예언을 한 것 아니겠는가! 무엇을 보았을까? 허탄한(거짓된) 묵시와 거짓된 점괘: 요는 그들이 본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지 않고 인간적인 술수와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를 보겠다고 하다가 허탄한 것(2-3, 자기가 보고 싶은 것, 자기 생각대로)을 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며 열심을 낸 결과 백성을 오도했고 그런 결과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다. 7.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다. 실제로 이런 자를 가리켜 선지자라고 하기보다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점쟁이: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7) 점쟁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무슨 사업을 해야 하고, 무슨 학교에 원서를 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기도받으러 다니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어떤 대학에는 합격하고 어떤 사업을 하면 돈이 된다’는 식으로 응답을 주실까? 성경에는 그런 식의 응답이 없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충성하라는 응답이 있을 뿐이다.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을 떠날 때에도, 유럽으로 향할 때에도 누구와 함께 어디로 가라는 지시는 없었다. 바나바와 싸우다가 행로가 바뀌기도 했고, 성령이 막아서 가려던 곳으로 가지 못하기도 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최선의 길을 찾으며 한발씩 내디뎠을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전해졌다. 8.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의 공회에 들어 오지 못하고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고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 외국에 가서 살면 되잖아?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은 망명이나 이민같은 방법이 전혀없는 중세의 ‘파문’과 같은 의미이다: 말하자면 천국에서 내어쫓기어 지옥으로 떨어지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는 끔찍한 욕이 되고 ‘암미(=내 백성이다)’는 것은 엄청나게 복된 이름이다. 9. 이스라엘이 언제 하나님을 알아보는가? 징계후(9, 14, 21, 23): 그 때에는 알아도 대부분의 경우에 소용이 없을 때다. 후회만 막심한 때일 가능성이 크다. 므낫세가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비로소 하나님을 알았더란다(대하 33:10-13). 그나마 다행이다.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았으니... 10. 선지자들이 행한 거짓말은 평강이 없는데 ‘평강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게 그렇게 큰 죄가 되는가?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셨는데(렘 25:8-11)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무조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리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은 70년이 지나야 돌아온다고 하는데도(렘 29:10) 곧 돌아올 것이라고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렘 28:1-4)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기만행위이다. 11. 선지자가 성벽을 수축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더니(5) 이제는 백성들이 담을 쌓는 일을 도우는 것(10)을 책망하시는가? 선지자가 수축해야 할 성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고 혹이(=백성들이) 담을 쌓는 것은 평강이 있다고 하는 거짓된 말씀을 따르는 것에 대한 비유다: 그렇게 백성들이 거짓 가르침을 따를 때 선지자는 회칠을 하면서 돕고 있다. 곧 무너져버릴 것인데도... 12. 올 해(2008년)는 기상대 수난의 해이다. 오죽하면 기상청장이 다시는 ‘인력이나 재원 부족’이라는 핑계를 대지 않고 최선을 다 하겠다고 공언했을까! 그래도 별 수 없을텐데... 도무지 예측할 수 없이 쏟아지는 호우에 기상대가 쩔쩔매는 것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자연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이스라엘과 선지자들이 애써 노력한 것도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폭풍 앞에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다(11). 이 말씀 속에는 무엇과 무엇이 대비되고 있는가?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심판: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자연의 위력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리듯 하나님의 심판 앞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 앞에 담을 쌓고 하얗게 칠이나 하고 있다니...! 13. 담이 무너지면 거기에 칠한 회는 어떻게 되는가? 본전도 못 건지지: 선지자들이 얼마나 헛된 짓을 하고 있느냐는 책망이다. 차라리 그런 열심은 없느니 못하다. 거짓말 하기에 바쁜 지도자보다는 게으른 지도자가 낫다. 14. 오늘 죽을 것을 모르고 여러 해 쓸 양식을 쌓는 것은(눅 12:19-21)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무너질 담에 회칠하는 것(12)도 마찬가지다. 오늘 죽을지, 내일 담이 무너질지 미리 알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14): 같은 의미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눅 12:21). 하나님이 없다면 오늘의 어떤 노력도 무의미한 것이다. 양식을 쌓는 일이 잘못이 아니고 담에 회칠하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잘못이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마 7:26)도 마찬가지다. 하나님만 계시다면 모래 위에 집을 지어도 걱정이 없다. 15.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진(15) 예루살렘’에 대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16)은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일까? 바벨론 포로들에게 속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선지자들(렘 29:9, 15): 현 상태는 예루살렘에 평강이 없는 상태, 즉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이전의 거짓을 전하던 선지자들)도 없어진 상태이니 바벨론에 포로로 잡힌 상태라고 해야겠다. 거기서도 하나님께서 곧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16. 예언하는 여자들도 있었네! 구약시대에 여자들도 선지자가 될 수 있었는가? 될 수 있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출 15:20), 사사 드보라(삿 4:4), 훌다(왕하 22:14-20)가 있었다. 여자는 잠잠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아직도 강한 편이다. 바울의 그 말이 반드시 그런 뜻인지는 다시 생각해야 할 여지가 있다. 여기서도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무슨 행위를 했는지를 문제삼고 있다. 17. 여선지자들의 목적은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것이었는데 무슨 도구를 사용하였는가? 방석(일종의 부적, 20절 참고)과 수건(18): 이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모양이다. 방석은 자신이 사용했고 수건은 손님들에게 쓰게한 모양인데 한 때 코미디에 등장했던 부채도사처럼 이런 소도구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현혹시켰던 모양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은 이런 인위적인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자들이 이런 외형적인 것에 치중하여 뭔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알맹이가 없는 사람일수록 외양에 신경을 쓰는 법이다. 교회의 외형이 점점 화려해지는 것도 어떻게 보면 걱정스러운 일이다. 18.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요즈음 말로 하면 뭘까? 복채: 어떤 점쟁이는 ‘기독교인 환영’이라고 써 붙여놨단다. 복채를 내지 않아도 된단다. 대신, 감사헌금을 한다나? 정신나간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얻으려고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는 것은 단 돈 몇천원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악한 일이다. 생계 수단으로 목사 노릇하는 것은 어떨까? 19. 새가 올무에 걸리면 빠져나가지 못한다. 멀쩡한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것도 그와 같다. 어떻게 이런 위험에 노출되지 않을 수 있을까? 꼼짝않고 둥지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될까? 에스겔서에서 반복되는 한 구절을 생각해보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이런 그물에 걸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엉뚱한 그물에 걸리는 법이다. 20. 방석이 떨어져 나가고 수건이 찢어지면 점쟁이는 어떻게 되나? 부채도사가 부채를 다 잃어버리면? 손님도 떨어지겠지: 도구를 바꾸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거짓인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다 제하여 버리셨으니 더 이상 사람들을 미혹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점쟁이의 불행이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냥 두고 보시지 않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선언이다. 21. 22절을 근거로 거짓을 예언하는 부녀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돈해보자. 하나님께서 슬프게 하지 아니한 자를 근심하게 하고 악인의 손을 굳게 하는 것: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짓을 행하는 것이다. 멀쩡한 성도를 불안케 하는 것이나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성도들을 부추기는 행위는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