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4장 |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찾는 자: 우상을 섬기면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에게나 갈 것이지 왜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를 찾아오는가? 하나님과 우상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여 ‘하나님이나 우상이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신이든 저 신이든 아무 신이든지 부지런히 믿어두면 그 중에 혹시 제대로 된 신이 있을 수도 있잖아’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면 이런 식의 행동을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른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다 빼앗긴 채 생활비만 노리고 함께 하는 아내인 셈이다. 4절의 ‘죄악의 거치는 것’은 곧 우상이다. 2.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실까? 응답하신다(4, 7): 직접 응답하시는 않지만(3) 선지자를 통해서 결국 말씀하신다. 다만 그들에게는 응답이 복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점이 다르다(그런 의미로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답을 해도 맞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대적이 되며 놀라움과 감계(=sign, 경고의 표시, 鑑戒: 거울 감, 계율 계)와 속담거리(바보짓을 해서 속담거리가 된다, 예, 刻舟求劍)가 되게 하신다(8). 우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응답(?)을 받는다(4절의 ‘우상의 많은 대로’). 3.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도 응답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5절의 후반절이 그 대답이 되겠는데 다른 번역을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잡아야겠다: 아무래도 개역은 오해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어지는 6절이 회개를 촉구하는 것을 보아도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아보인다. 4. 6절을 인용하여 ‘회개하는 사람이 마음으로만 회개해서는 안되고 행동까지 변해야 한다’고 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6절의 두 가지 표현은 동일한 내용의 반복이지, 별개의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행동까지 변해야한다는 당위성은 굳이 6절을 인용하지 않아도 된다. 5. 선지자의 말을 다 믿을 수 있나? ‘우상을 섬기는 자’는 선지자(실상은 거짓 선지자)의 말을 다 믿어선 안 된다: 자신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9). 하나님께서 친히 응답하시는 것(7)도 위험하다. 우상을 섬기는 자에게 위험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범죄자가 따라오는 사람이 없어도 놀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6. 선지자가 유혹을 받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9) 선지자의 죄악을 묻는 것(10)은 곤란하지 않을까? 여호와께서 선지자로 유혹을 받게 하셨다는 것은 유혹을 받도록 버려두셨다는 뜻이다(참고, 롬 1:24, 26, 28). 세상의 모든 악도 하나님께서 버려두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을 받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그런 선지자를 버려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는 자체가 엄청난 징계다. 깨닫고 돌아서는 자가 복되다. 7. 심판을 초래하는 말씀을 선지자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고(11): 부모가 아무리 징계를 한다고 해도 자기 자식을 버리기 위함은 아니다. 자식을 괴롭히기 위함도 아니다. 만약 그런다면 제정신이 아니다. 8. 왜 하필이면 노아, 다니엘, 욥을 언급하시는 걸까? 악한 시대나 극한 고통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신실했던 사람들이기 때문: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분노를 가장 잘 누그러뜨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본다면 이들이 살았던 시대가 현재 이스라엘의 시대와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이들이 온다 해도 안 된다는 얘기다. 그들의 자녀도 혜택이 없으니(16, 18, 20)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라? 9.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도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지 못하여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는 나라는 13절의 ‘어느 나라...’ 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 아니네? 가정해서 말하는 어느 나라에는 이런 재앙이 한 가지만 내려도 대책이 없는데 예루살렘에는 네 가지 중한 벌을 한꺼번에 쏟는다는 말이다(21). 10.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사나운 짐승을 보내면 땅이 황무케 되는가(15-16)? 짐승을 보내면 적막해진다(15). 땅이 황무케되는 것은 별도의 조치다: 짐승 때문에 땅이 황무케되는 것이 아니다. 땅을 관리할 사람이 없어져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번성할 곳에 짐승이 번성하는 것이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황무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되는 셈이다. 11. ‘칼아 이 땅에 통행하라’? 칼을 보고 돌아다니란다(17). 그러면 어떻게 되지? 짐승이고 사람이고 걸리면 죽는거지: 칼을 의인화시킨 표현인데 결국은 외적의 침입을 가리키는 말이다. 12. 22절의 ‘그 가운데 면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디로 끌려오는 걸까?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선지자의 이 말을 듣고 있는 자는 이미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온 사람들이다(1, 2차 포로). 아직도 예루살렘이 시드기야 왕에 의해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얼마 후 예루살렘이 철저히 파괴되는 과정에서 죽지않고 소위 3차 포로로 끌려오는 사람들이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곧 포로에서 놓여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꿈 깨라’는 말이다. 13.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읍 예루살렘을 어떻게 저렇게 무참하게 파괴되도록 버려두시는가?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은 어디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과정에서 살아남아 끌려온 자들의 행동과 소위에서(22): 도대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으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실까? 14. 본 장에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표현이 몇 번 나오는가? 왜 이렇게 강조해야 하는가? 여섯 번(11, 14, 16, 18, 20, 23): 하나님의 권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만큼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떨어져서 안되는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자칫하면 뒷감당을 할 수 없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