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7장 |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서 흩어졌는데다 정신적 지주였던 예루살렘마저 완전히 무너져 버렸으므로: 소망이 없고 멸절되었고(11), 무덤에 갇힌 자였다(12).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는 것은 다 죽었고, 죽은지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2. 어떻게 말라빠진 뼈가 살아날 수 있는가? 주께서 아시나이다(3, 계 7:14): 참 좋은 답이다. 나는 모른다는 말인데 하나님은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고백이 포함된 말이다. 이 말이 의미가 약간 변질된 채 영어에 남아 있다. 그래서 God only knows 하면 Nobody knows란 뜻으로 쓰인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고 하신 것(창 22:8)도 마찬가지다. ‘모른다’고 하지 말고, ‘못한다’ 하지 말고 ‘주께서 하시리이다’ 하자. 주님께서 하시려면 바싹 마른 해골도 살아날 수 있다. 3. 마싹 마른 뼈들이 서로 연락되고 근육이 붙고 살이 올라 생기를 찾고 일어서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한 마디로 ( )이다. 기적, 불가사의: 단순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더 멀리 보면 예수께서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일으켜 세우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범죄하여 죽은 인생을 독생자를 희생시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으켜 세우신 것은 우리에게는 정말 기적일 뿐이다. 4.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시는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6, 13). 5. 마른 뼈들이 서로 제자리를 찾느라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혀도 완전하게 회복된 것이 아니다. 또 무엇이 필요한가? 생기(10): 곧 성령을 가리킨다. 겉 모습만 멀쩡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제자는 제자로되 온전한 제자는 아니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도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지만 생기가 들어가서야 생령이 되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육체가 아니라 생기에 있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할 때에만 사람이 사람일 수 있다(14). 6.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에 차서 선포했더니 해골이 살아나 군대가 되었다. 맞는 말인가? 위험한 생각이다. 해골이 살아서 군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능력이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에 차서 선포했더니 해골이 살아나 군대가 되었다는 표현은 놀라운 회복의 원인자 선지자인 것처럼 이해되기 쉽다. 주의해야 한다. 이 놀라운 기적의 근본원인은 선지자에게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 7. 해골이 살아서 군대가 되려면 자기 자리를 찾아가서 자기 형상을 회복하고 생기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면 옳은 말인가? 위험한 대답이다. 해골이 살아서 군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능력이다. 해골이 주도적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기적의 근본원인은 해골에게도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 8. 이스라엘은 단순히 회복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위력적인 민족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10절의 ‘큰 군대’). 훗날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얼마나 강력한 나라를 이루었는가? 역사적으로 강력한 적은 없었다. 페르시아, 헬라, 로마 시대를 지나면서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다. 현대에 와서 비록 무시 못할 민족이 되긴 했지만 본문이 현재의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다. 진정한 이스라엘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다(롬 2:27-28, 9:6-8). 9. 11-14절은 환상의 구체적인 해설이다. 뼈들은 골짜기에 있는데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는가? 무덤(12-13): 바벨론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는 것이 무덤에 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백성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고토로 인도하시겠단다. 이스라엘의 고토귀환은 전혀 이스라엘 자신의 공로가 아니다. 10. 해골이 뼈가 맞춰지고 살과 가죽이 붙었지만 생기가 들어가야 군대가 되었다. 무덤 속의 이스라엘도 제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그 속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신(=성령): 원래 인간은 영적인 존재, 즉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만드셨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인간은 동물이나 다름없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11. 하나님께서 왜 마른 뼈 같은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는 기적을 행하시는가? 본문에서 그 답을 찾는다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13, 14): 무엇이 답답해서 이렇게까지 안달이 나셨는가? 언제쯤 우리도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게 될까? 인간을 얼마나 귀하게 창조하시고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하셨는지 알 것도 같은데... 12.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란 표현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요셉의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 누구인지 애매해진다. 후자가 북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전자의 ‘유다의 짝 이스라엘 자손’은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 흩어진 북이스라엘 자손들 중에 아마도 남쪽 유다로 온 사람들 아닐까? 대하 11:13, 15:9에 따르면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쪽으로 온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 특히 대하 30:1-27에 따르면 히스기야 시대에는 유다의 통치력이 북이스라엘 지역까지 뻗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 북 이스라엘을 가리켜 왜 ‘에브라임의 막대기’라고 할까? 자그마치 열 지파가 뭉친 나라인데? 북이스라엘의 중심지파는 요셉의 두 아들,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었다. 그 중에서도 장자의 복을 받은 에브라임이 더 중심에 있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호세아, 민 13:8)가 이 지파의 대표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여 후일에 종교적 중심지가 된 실로도 에브라임의 경내에 있었다. 이들의 자부심이 대단하여 다른 지파와 종종 마찰을 일으켰다(삿 8장, 12장). 14. 원래 하나의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을 유다와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하신 분이 누구신데 이제 와서 하나로 만드시는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일이 그렇게 되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은 솔로몬과 르호보암 탓이다. 갈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본 뜻이 아니다. 하나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창 1장: 나뉘어진 것을 보고는 ‘좋았더라’고 하시지 않았음). 15. 그냥 선포하듯이 말만 해도 될 것을 굳이 이상한 막대기를 들고 설명을 해야 하는가? 시청각 교재를 활용하는 것: 어른들도 이런 시청각 교재를 쓰는 것이 더 메시지가 선명하게 전달된다. 그래도 무리가 무슨 뜻인지 못 알아 듣는 모양이다. 하긴 나라마저 깨끗이 망해버렸는데 오래 전에 갈라진 나라가 하나가 된다는 것을 믿기는 어렵겠다. 16.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 헬라제국의 압제 하에서 벗어나 세운 나라와 왕의 이름은? 다윗 왕조인가(24-25)? 하스몬 왕조(BC 142-63)의 요한 힐카누스: 역사적으로는 마카비 가문의 맛다디아 → 유다 마카비우스 → 시몬 → 요한 힐카누스(BC 135년에 왕으로 즉위함)로 지도력이 이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한 나라와 임금이란 영적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그의 나라를 가리킨다(24, 25-26). 17. 이스라엘이 다시는 더럽히지 않을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23)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스라엘이 징계를 당하기 전에 행한 죄악들: 그것들 때문에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때에는 이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하여 다시는 범죄하지 않게 하시겠단다. 옛날에 그렇게 하셨더라면? 홍수로 징계하신 후에 다시는 징계하지 않으시겠다는 말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차피 버릴 수 없는 자식이니 결국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18.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신 최초의 약속은 아브라함하셨는데 왜 야곱에게 준 땅이라 할까(25)? 잘 모르겠다.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애정이 더 있는가?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에 대한 애정 때문 아닐까? 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복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땅, 자손, 왕(25), 화평, 견고, 번성, 성소(26) 등인데 핵심은 하나님이다: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영원함에 있다. 곧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다. 성소는 하나님의 집인데 훗날 세워졌다가 허물어지는 성전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서의 집이다. 20. 하나님께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을 여기서 처음 하셨을까? 아니면 어디서 하셨을까? 출애굽 때 이미 하셨다(출 20:2): 800여 년이 지난 지금 여기서 또 같은 말을 하신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동일한 말씀이다. 출애굽 때 처음 하셨고 이제는 바벨론에서 다시 불러내셔서...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한 번에 이루시지 못하고 또 같은 말을 반복하셔야 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