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장


1. 두루마리 곧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먹는 것이 아니다. 먹는다는 것은 깨닫는다는 의미이다. 결국 상징적인 의미라는 말이다. 성경에서 먹는 것이 아닌데 먹으라고 하는 게 또 뭐가 있는가?

    예수님의 살과 피: 믿으라는 말이다. 깨닫거나 믿는 것을 먹으라고 표현하는 의미는 아마도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을 먹고 살아갈 힘을 얻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에서 사역할 힘을 얻는 것이 진정한 힘이다. 자신의 탁월한 열심과 능력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에 무너져내릴 위험이 크다(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으니 말씀에 통달하게 되었고 더 이상의 말씀은 주시지 않는가?

    계시는 계속된다: 그렇다면 1-3절 말씀은 단회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사역하는 일 전체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3. 말씀을 시급하게 전해야 한다고 안달하는 열심있는 전도자가 적지 않다. 아무리 시급하더라도 순서가 있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말씀을 먹는 일: 가기 전에 먹어야 한다! 무조건 가면 성령께서 필요한 대로 채워주신다? 모세, 바울, 다윗... 일을 맡기시기 전에 준비된 사람을 부르신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까? 아무런 준비도 없는 사람을 불러서 위대한 사역을 맡기신 경우는 없다.

    전도하지도 않으면서 성경을 많이 알기만 하면 무엇하느냐고? 학자도 필요없고, 교수도 필요없고 오직 전도자만 필요하다는 이런 인식은 참으로 위험하다. 이론적인 뒷받침이 없는 열심은 순식간에 식어버릴 수 있다. 전쟁에는 전방에서 총을 들고 몸소 뛰어야 하는 전투병 못지 않게 후방에서 병참을 담당하는 것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아니,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도 동일하게 중요한 일이다. 전쟁이 길어진다고 생각해보라.

4. 두루마리가 어떻게 달아? 두루마리의 내용이 희망에 넘치는 것이라서?

    두루마리를 음식에 비유했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에스겔이 전하는 말씀의 내용은 주로 경고와 심판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달지? 어떤 내용이었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최종적으로 단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날이 곧 희년이요, 안식의 완성이다(사 55 장).

5.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이 두 번인데(5, 6) 각각의 의도가 어떻게 다른가?

    5절은 에스겔이 맡은 사명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고, 6절은 이스라엘 족속의 완악함을 설명하려는 의도: 말을 알아 듣는 놈들은 회개치 않고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은 회개할 것이다(마 11:21-23). 비싼 돈 주고 과외시켜 줬더니 정작 하란 녀석은 제대로 못 하고 어깨 넘어 보던 녀석이 제대로 하더라? 기특하다고? 다행이다. 하지만 제대로 못하는 큰 녀석을 어이 할꼬?

6. 이방인에게 선지자를 보냈더라면 이방인들은 회개했을 것이라면 차라리 이방인에게 선지자를 보내실 것이지 굳이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또 선지자를 보내시는가?

    회개하라는 것보다는 심판이 있음을 선포하는 것: 길게 보면 한 번 정한 뜻을 끝내 이루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열심(고집)이다. 아무리 듣지 않아도 끝내 듣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다. 내심은 그렇지만 여기서는 심판이 더 강조되어 있다.

7. 히브리인들의 이름에 잘 쓰이는 ‘엘’은 하나님, ‘야’는 여호와를 뜻한다. 에스겔도 ‘에슥 + 엘’이다. 무슨 뜻인지 8-9절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화석은 化石이 아니고 火石, 즉 부싯돌이다. 돌이 단단해서 부싯돌이나 칼로 사용했던 돌이다. 이마와 얼굴을 그보다 더 단단한 금강석(다이아몬드)같이 단단하게 만들어 주셨다.

8.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파송하시기 위해서 무슨 준비를 해주셨는가? 1장부터 여기까지 내용을 세 가지로 정돈해보자.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체험케 하셨고(1장, 3:12-13), 말씀을 먹게 하시고(2장), 얼굴과 이마에 철판을 까셨다(3장). 준비 중의 준비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대한 체험이다. 이것이 사역의 토대가 된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과 감격없이 교회에서 충성한다? 위험천만한 일이다. 큰 업적을 이룬다해도 자신의 욕심을 채워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9. 전도하는 자는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나? 듣든지 말든지, 싫어하든 말든 밀어붙여?

    에스겔의 상황은 심판을 선포하는 특수한 상황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늘 우리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게 다급한 자세가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 쉽다. 하나님의 은혜 위에 전도자의 인내, 지혜, 헌신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 긴 세월, 고락을 함께 하며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보여주면서 전도해야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물론 더 이상의 시간적 여유가 없는 특별한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특별한 경우이다.

10. 겁이 나서 아플까, 아프기 때문에 겁이 나는 걸까? 맛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맛이 있을까, 맛이 있었기 때문에 맛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이런 뚱딴지같은 질문이 10절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으로 받고 귀로 들어야 한다: 말을 들어보고 마음을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다. 때로는 반대가 되어야 할 때가 있다.

    짝 지은 두 질문은 서로 상관이 있다: 한 두 번의 경험이 생각에 영향을 준다. 그렇게 되면 거꾸로 생각이 다음의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경향은 물질분야보다 영적인 분야에서 더 강하다. 말을 들어보고 수용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때로는 마음을 먼저 열어야 귀가 열리기도 한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들어보고 마음을 정하겠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롬 10: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 15:8). 때로는 사람이 싫으면 그가 하는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무조건 싫어지기도 한다.

11. 여호와의 권능이 힘있게 나를 감동하시는데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다니(14)?

    하나님의 근심과 분노를 자신이 느끼는 것: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먹고 성령의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경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참고, 빌 1:8).

12. 생물들은 하나님을 수종하는 존재들이었는데(1장) 찬송도 하네? 뭘로 찬송을 하는가?

    날개와 바퀴로: 곤충이 날개를 비벼 소리를 낸다더니? 바퀴를 돌려서 내는 소리는 사이렌과 같은 소리다. 이것을 크게 울리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음성처럼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12)라고 묘사했는데 우리가 알기 어려운 다른 종류의 소리인 셈이다.

13. 1:4절부터 시작된 환상이 어디서 끝이 나는가?

    3:14절

14. 에스겔이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강 가에 거하는 자들에게’ 나아갔단다(15). 그 전에는 어디 있었는데?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1:1): 그러니까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강 가에 거하는 자들에게 나아갔다’는 표현이 공간적인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에서 현실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15. 환상을 보고난 후 칠일을 민답히(얼떨떨하게) 지냈단다. 놀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일주일을 보냈다는 말이다.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이었을까?

    아마 그럴 것, 그러나 진짜 놀란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2:1-7) 때문 아니었을까?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들에게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2:4-5)는 말씀이 그에게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을 것이다.

16. 델아빕이란 지명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와 관계가 있을까?

    단어상으로 같은 말이다. 델아빕은 바벨론에 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단거주지였던 모양이다. 현재의 텔아비브는 1909년, 구 욥바의 유대인 60가족(약 250인)이 토지를 사들여 개발한 곳이다. 유대인의 미래국가를 그린 헤르츨(T. Herzl 1860.5.2-1904.7.3. 오스트리아의 유대인)의 소설 [Altneuland, 1902]의 히브리어 제명에 따라, 텔 아비브라 이름했단다. ‘텔’은 언덕, ‘아비브’는 ‘이삭’을 의미한다.

17.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깨우쳐야 할’ 사명(17)은 에스겔처럼 특별하게 소명을 받은 자만의 일일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명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파수대를 들고 다니는 사람만이 파숫군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파숫군이다.

18. 하나님은 선택한 자기 백성만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 아닌가?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이 말씀은 악인마저 깨우쳐서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하는 것 아닌가? 이 악인은 선택한 자기 백성 중의 악인인가? 선택했으면 어떻게 악인이 되는가? 아이고, 머리야!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신비다.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믿은 내가 만세 전에 선택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신비의 영역이다. 그걸 알아내려니 머리가 아프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딤전 2: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뿐이다.

19. 일반적인 경우에 한 사람이 말씀을 듣고 교회에 나오기까지 100번 정도 권유를 받는단다. 수 많은 사람이 믿으라고 권면을 한 끝에 회심을 하게 된다는데 그러면 이 사람을 전도한 상급은 최후에 한번 초청한 사람인가? 도중에 수십번 권유한 사람의 공인가? 18-19에서 이런 질문의 답을 찾는다면?

    하나님은 열매가 얼마나 맺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감당했느냐를 따지겠단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회심하기까지 그에게 선한 영향을 끼친 모든 사람에게 상급이 분배(?)되는 것이 옳겠다. 선지자의 말을 듣고 안 듣고는 그 사람의 문제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선지자의 의무다. 열매에 집착하지 말고 말씀을 전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 했다(고전 9:16).

20. 의인이 돌이켜 악인이 되기도 한다(20)? 성령께서 택한 백성을 지키셔서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게 하신다는 교리(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7장)와는 다른 얘긴가?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자(=구약적인 의미의 의인)라는 의미다. 자신의 공로로 의를 이루는 자라는 의미다. 자신의 공로로 이룬 것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가변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신 의인(신약적인 의미의 의인)이야말로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자신의 공로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다.

21.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는 말씀(20)에 따르면 소위 노망이 들거나 정신이 혼미하여, 죽을 때 하나님을 모른다고 한다면 평생 헌신한 것은 헛일인가?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말은 효력이 없다. 연세가 많아 자기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더라. 사람의 경우에도 그런 분의 말은 효력이 없는 것이 정상 아닌가?

22. 들로 가랬다가 또 집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22-24)? 왜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가?

    준비 기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그만큼 어려운 사역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재차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준비시키시는 것이다.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시는 것도 훗날 그런 일이 있을 것(25)에 대한 훈련이다.

23. 선지자가 말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면(26) 뭣하러 보내나?

    그런 때도 올 것이라는 의미다: 미리 훈련시키시는 의미로 하시는 말씀이다. 아마도 집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게 하시면 당연히 아무런 말도 못했을 것이다. 할 말이 있는 사람에게 말을 하지 못하게 하면 속이 터진다. (렘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러나 말을 해야할 때에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해야 한다(27). 그러면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할 것이다. 결국은 아직도 선지자로서 나설 준비만 하고 있는 것이다! 충분하게 준비를 해서 사역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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