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42-43장 |
1. 다시 천사가 나를 데리고 간다. 여태 어디 있다가? 천사가 혼자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이제 바깥 뜰로 나왔다(40장 평면도의 12번 위치). 2. 북편 뜰에 두 방이 있고(1) 남쪽에도 동일한 방이 있다(10-12). 위치나 모양의 정확한 형태는 알아보기가 어려운 모양이다(자세한 내용은 생략). 이 방들의 용도는 무엇인가? 제사장들이 1) 지성물을 먹거나 2) 보관하거나 3) 옷을 갈아 입는 곳: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제물이나 의복조차 거룩함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속건물을 지으셨다. 사방이 500척이나 되는 담의 역할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20).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무엇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까? 복장, 음식, 건물? 진짜 중요한 거룩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3. 만약 이 부속건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제사장들이 거룩한 모습을 유지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 하나님께 드렸던 제물을 아무 곳에다 함부로 둘 수도 없고, 제사장이 예복을 어디서 어떻게 갈아 입겠는가?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필요한 방을 허락하신 것이 참으로 세밀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성전의 바깥뜰에 이런 중립적인 장소(평상복을 입고 와서 예복으로 갈아입는 다는 점에서)를 허락하신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4. 성전 내부 척량하는 일을 마치고(40:3-42:14) 사면 담을 척량했다. 모세가 만든 성소와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원래 성소는 직사각형이었는데 에스겔 성전은 정사각형이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새예루살렘도 장방형으로 나온다. 아마도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43장 1. 선지자는 동향한 문에 처음 왔는가(1)? 아니다. 이 계시의 초반에(40:6) 왔었다. 척량을 시작할 때 동향한 문에서 출발했다가 이제 출발지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결국 다시 동향한 문에 왔다는 것은 척량이 다 끝났다는 뜻이다. 2.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를 가셨다가 이제 오시는 걸까(2)? 이스라엘의 패역함 때문에 떠나셨다가(10:18-22, 11:22-24) 이제 다시 돌아오신다.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는 것도 엄청난 기쁨일텐데, 집나간 하나님께서 돌아오신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어른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시는가?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임금님이 궁을 버리고 남의 나라 대사관으로 피해버린 아관파천 때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3. 하나님께서 오신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오신다(2)고 말하는 이유는? 직접 뵐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께서 임하셨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실제는 뵐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뵐 수도 가까이 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4.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3)이 벌써 몇 번 째인가? 4번 째(3): 그발 하숫가에서(1:4-28), 들에서(3:23-24), 성읍을 멸하러 올 때(9:3-11:25). 전에는 성읍을 멸하려고 임하셨지만 이제는 영광으로 임하셨다.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멸할 수밖에 없는 고약한 백성들이어서 징계를 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이들을 회복시키려 하신다. 철없는 아이들이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는 어렵다. 결국은 어른이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셔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다. 에스겔이 신통한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을 뵌 것이 아니다. 5. 에스겔도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는데(5) 웬 사람이 곁에 서 있는가(6)? 하나님을 대신하는 분이므로 천사로 봐야 한다. 사람을 상대로 하려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 실제로 사람은 아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모든 천사도 사람을 위해서 그런 모습을 갖추었을 뿐, 실제 모습이 아니다. 6. 성전의 특징은 보좌의 처소, 발을 두는 처소,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으로 세 가지다(7). 각각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보자. 보좌의 처소: 보좌는 왕의 자리를 가리키는 말로 통치를 의미한다. 성전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중심지다. 7. 하나님께서 이전에 성전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7-9절에서 두 가지 지적한다면? 음란과 시체로 성전을 더럽혔음(7b-9): 여기서 음란이란 우상숭배다. 또, 시체를 성전에 두었을 가능성은 없다. 부정한 시체를 곁에 두는 것처럼 하나님의 전 바로 곁에 우상의 전을 두었다(8)는 책망이다. 그렇게 보면 죽은 자들의 시체도 결국은 우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8. 새성전을 보는 것만으로 이스라엘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할까(10)? 성전의 형상을 측량하는 것은 무엇과 같은 의미일까? 새성전을 보는 것과 측량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하나님의 모든 규례와 법도와 율례를 알게 하는 것: ‘보여서’라는 말은 ‘알게하다’란 뜻이다. 측량한다는 것은 잘 알게 됨을 의미한다(=아담의 이름짓기, 김춘수의 꽃).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성전을 주시는 의미와 의도를 알려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라는 명을 받았다. 9. 느닷없이 웬 ‘산 꼭대기 지점’ 인가? 어디가 지극히 거룩하다고 하시는가?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 산 꼭대기 지점은 성전터를 가리킨다. 지성소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주위가 다 거룩하다고 하신다. 거룩의 범위가 많이 확장되었다. 제사장의 구역 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리려는 백성들의 지역까지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는 의미 아닐까? 10. 한 자(=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까지, 즉 일 규빗)면 한 자지, 한 자에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은 뭐야? 왕실 규빗이다(40:5): 왕실에서 쓰는 자는 좀 커야 백성들에게 권위가 서는 모양이다. 아예 자를 더 크게 함으로 모든 것이 일반 백성들보다 더 컸다. 왕실세겔은 일반세겔보다 배나 컸고, 성전 세겔도 아예 1/5이 더 크도록 만들었다. 제사장에게 내야 하는 속전으로 1/5 세겔을 더 내야 했으니까 아예 속전이 첨부된 세겔을 만든 셈이다. 11. 제단은 밑받침을 제외하고 몇 층인가? 3층: 12. 번제단의 전체 높이는 얼마인가? 11척(1+2+4+4): 거의 6m 높이다. 그러니 계단이 있어야 한다. 13. 번제단의 받침은 가로 세로가 얼마인지 추정해보자. 17 × 17척: 3층이 12×12, 2층은 14×14+1(가장자리의 광), 1층은 가장자리에 일척짜리 광이 있으므로 16×16척이어야 한다. 밑받침은 거기에 또 일척짜리 광이 있으므로. 14.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에는 여러가지 기물이 있었는데 에스겔 성전에는 다른 기물은 없고 번제단만 엄청나게 크다. 왜 그럴까? 속죄가 가장 중요하다: 이걸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셔야 했다. 구제불능에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니,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단 하나, 속죄! 그것도 하나님께서 다 해주신 일인데... 15.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것을 흔히 우리가 쓰는 다른 말로 하면? 봉헌식(26): 16. 제사장을 일컬어 아론의 자손이라 하지 않고 왜 사독의 자손이라고 하는지 44:15을 보자. 구체적인 정황은 나타나 있지 않으나 우상을 숭배하던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올 곧게 하나님을 섬겼단다. 사독이 단독으로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게 된 것은 다윗을 충성스럽게 섬긴 것에서 비롯되었다(왕상 2:26-27). 17. 제단을 거룩하게 하는 데에는 칠일이 걸렸다(26). 제물도 많이 드려졌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을까? 모세 때에도 그랬다: 제단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관유를 일곱 번 뿌리고 발랐으며 (레 8:10-11), 수송아지의 피를 제단 뿔에 바르고, 밑에 쏟았으며(레 8:15), 이것을 칠일 동안 계속했다(출 29:36-37). 제단을 정결케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은 속죄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한 일임을 의미한다. 18. 요약하면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기 전에 무엇을 드려야 하는가? 속죄제(7일간): 속죄제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한 후에 번제와 감사제가 소용이 있다. 관계가 회복되기 전에 이런 저런 선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