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48장


1. ‘극북에서’라는 말은 어느 말을 수식하는 걸까? 참고로 바로 뒤의 ‘하살에논까지’는 아니다.

    앞의 ‘이 같을지니라’가 좋다: 북에서 남의 순서로 땅을 분배하기 때문이다. 즉, 수직선상의 출발점이다. 반면에 ‘헤들론 길로 말미암아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지계에 있는 하살에논까지’는 가장 북부 지역의 ‘동편에서 서편까지’를 의미한다. 쉽게 설명하지? 개역성경을 탓할 일은 아니다. 알아듣기 쉽게 번역할 수도 있지만 원문의 형태를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도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특별히 이런 표현이 어려운 것은 현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2. 여호수아가 나누어준 땅과 비교해보면 여기 땅의 분배가 현실적이지 않다고 볼 이유가 무엇인가?

    지형에 대한 고려없이 수평으로 직선을 그어 나누었다: 따라서 지파별 경계는 휴전선 스타일이 아니고 38선 스타일이다. 에스겔의 메시지의 핵심도 이 땅에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기보다는 훗날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도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3. 원래 단지파가 얻은 땅(수 19:40-48)은 북쪽이 아니었다. 북쪽 가장자리는 외적의 침입을 먼저 받는 곳이라서 좋은 땅이 아니다. 이들이 왜 북쪽 땅을 얻게 되었는지 삿 1:34-36을 찾아보자. 그래서 회복될 이스라엘에서도 가장 북쪽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가?

    제비뽑아 얻은 땅은 지중해 연안이었으나 아모리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만만한 라이스를 점령한 탓이다. 그 일과 여기서 북쪽을 차지한 것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12지파가 예전에 차지하던 지역과 여기서 새롭게 차지하는 지역의 상관관계가 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요단 동편의 두지파 반이 서편으로 건너온 것과 북부의 스불론과 잇사갈 지파가 남쪽으로 내려오고, 가장 남쪽이던 유다가 중부지역으로 옮기는 등의 변화를 감안할 때 이전에 차지한 지역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4. 단부터 유다 지파까지는 7지파다. 그 다음의 땅은 이스라엘의 가운데 부분이다. 꼭 가운데 부분을 하나님께로 드려야 하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생각도 좋은 생각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계셔야 한다는 생각은 정말로 복된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중심에 자리를 잡고 계시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어른이 달라고 해서 드린다는 생각과 어른을 기꺼이 모시고 싶어하는 마음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땅은 이스라엘의 가운데이고 그 땅의 가운데 땅은 제사장의 땅이고 그 가운데에 성소가 위치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계시겠다는 말이다.

5. 유다 지파의 땅을 언급하고서는 잠시 다른 얘기가 길게 이어진다(9-22). 하나님께 드릴 땅의 얘기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유다의 복이다. 왜 그런가?

    중앙에, 그것도 하나님의 땅에 인접해 있는 것은 특별한 복이다: 군대에서는 계급보다는 보직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중요한 일을 맡았을 경우에는 계급이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권력자와 가까운 위치에 있을수록 힘이 더 세다. 하나님 곁에 있다는 것은 가장 복된 일이다.

6.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지는 땅을 차지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어떤 순서로 언급되는가?

    제사장(10-11), 레위인(13), 왕(21): 이스라엘의 왕은 찬밥이네! 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다음이라는 것을 아는 왕은 복되다. 별을 몇 개씩이나 단 장군이 계급이 한참 아래인 군목을 깍듯이 대우하는 군대교회는 얼마나 복될까?

7. 8절의 예물과 9절의 예물은 내용상 어떻게 다른가?

    크기가 다르다: 8절의 예물은 광(남북)이 이만 오천척, 장(동서)은 다른 분깃의 동편에서 서편까지와 같고(이만 오천척보다 훨씬 더 길다, 위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평균을 쳐도 십만척을 훤씬 넘는다) 성소는 그 중앙에 있다. 반면에 9절의 예물(=10, 사독의 자손의 땅, 11)은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일만척이다. 더구나 이 땅의 가운데에 성소가 있다는 것은 이 땅이 8절 예물의 가운데 일부라는 말이다(이만 오천 × 일만척).

8. 사독의 자손, 곧 제사장(11절은 동격으로 수정해야함)에게 돌릴 땅(9-12)의 크기는?

    이만 오천 × 일만척(10): 레위의 지계와 연접하여 있다. 어떤 경우에도 그릇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것에 대한 상이다(참고 44:11-15).

9. 레위의 분깃은 제사장의 지계와 연접해 있고 크기도 동일하다. 레위와 제사장의 땅을 합치면 광이 이만척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드린 땅이 아직도 광 오천척 장 이만오천척이 남는데?

    15절의 ‘이 이만오천척 다음으로 광 오천척’은 이만 오천척 중에서 나머지 오천척이란 뜻이다. 45:6에 보면 이 나머지 땅(광 오천척과 장 이만 오천척)을 성읍의 기지를 삼으라고 했다. 그 땅의 가운데에 사방이 사천오백척인 성읍과 그 바깥에 폭이 이백 오십척인 들이 있다(15). 하나님께 예물로 드린 땅이 반듯해야 하려면(20) 그 바깥 양쪽으로 장이 일만척, 광이 오천척인 땅 두 조각이 성읍 기지가 되어야 한다.

10. 팔지도 못하고 바꾸지도 못하는 땅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땅을 부동산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팔지 못하는 것이 소용없는 짓이지만 땅을 생산 수단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당연하다. 처음 익은 열매를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듯이 특히 레위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우리가 가진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전제를 잊지 말자.

11. 하나님께 예물로 드린 땅(8절)은 거룩할텐데 제사장이나 레위의 몫만 거룩하고 성읍은 속되다는 말인가?

    하나님께 드려진 것 중에도 더 거룩하고 덜 거룩한(?)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제사장이나 레위의 역할 중에는 상대적으로 덜 거룩한 일(18절의 양식을 삼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해야지만 먹고 싸는 일도 해야하지 않는가? 그런 경우처럼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 속된 부분(부정하다는 뜻이 아니다)을 인정해주시는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를 드려야 한다.

12. ‘거룩히 구별할 땅과 성읍의 기지’는(21) 넓이가 얼마나 되는가?

    장 이만 오천척, 광도 이만 오천척(20): 8절의 예물 중 가운데 부분이다. 이 부분을 삼분하여 제사장, 레위, 성읍의 기지로 사용하였다. 순서는 어떻게 될까? 가장 위 부분이 레위, 가운데가 제사장, 아래 쪽이 성읍 기지다. 땅의 가운데에 성소가 있다는 것으로 보아 제사장의 땅이 가운데 부분이다. 그 바깥의 양쪽 부분(서로 분리된 상태)이 왕에게 주는 땅이다.

13. 왕이 차지하는 땅은 동서로 분리된 상태이다. 그 중간에는 무슨 땅이 있는가(21-22)?

    제사장의 땅과 레위 사람의 땅과 성읍의 기지: 거룩히 구별할 땅(21)이란 제사장의 땅(12)과 레위 사람의 땅(14)을 가리키는 말이다.

14. 다음 표현이 왕이 차지할 땅의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 말인가? 1) 레위 사람의 기업 좌우편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이며 2)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에 있을지니라(22)

    1) 레위 사람의 기업 좌우편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 = 동서, 2)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 = 남북

15. 1절에서 ‘헤들론 길로 말미암아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지계에 있는 하살에논까지’는 북방경계선이다. 그러면 남방경계선을 가리키는 말은?

    28절의 ‘다말에서부터 므리바가데스 물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까지다.

16. 각 지파별 위치를 하나님께서 다 정해주셨는데 왜 제비 뽑아 나누어줄 땅이라고 하실까(29)?

    제비뽑는 중요한 이유는 공평이다.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공평하게 나누어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다, ‘너희가 제비를 뽑아도 이렇게 될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겼던 지파가 성전 가까운 지역을 얻었다. 아마도 그게 하나님께서 보시는 공평일 것!

17. 성읍의 출입구에 대한 언급을 하는데(30-35) 내용상으로는 15절에 이어질 내용이다. 성문은 몇개이며 위치는, 그리고 이름은?

    12개, 사방에 3개씩, 각 지파의 이름을 딴 것이다: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의 문과 같다(21장). 요한이 에스겔을 표절한 것 아냐? 사람들이 독창적으로 써야 할 내용이 이렇다면 틀림없는 표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저자가 되시고 하나님께서 하실 동일한 일을 묘사하면 같을 수밖에 없다.

18.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에게 가장 바람직한 소망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지 본문을 이용해서 설명해보자.

    여호와와 함께 거하는 것: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오는 것, 돌아와서 행복하게 사는 것, 다시는 포로로 잡혀가는 불행을 당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된 말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다. 구속사의 최종 목표도 이것이다. 그래서 그 성읍의 이름은 여호와삼마다.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에스겔의 멋진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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