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장


1.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 서두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표현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고전, 고후, 엡, 골)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롬, 빌)이다. 이런 표현에 비하면 갈라디아서의 서두는 어떤가?

    아주 강성 발언이다. 퉁명스럽고 과격하게 책망하는 느낌이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하였다. 같은 회사의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 다툼이 생기면 있을 수 있는 말 ‘월급을 네가 주냐?’, ‘네가 날 임명했냐?’ 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바울은 왜 하나님을, 우리가 잘 쓰는 표현처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이 두 가지 표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우리와 거리감이 더 있어 보인다. 달리 말하면, 천지만물의 창조보다 우리에게 더 직접적이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살리신 일이다.

3. 바울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기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했을까?

    “누가 바울을 사도로 임명했느냐?”: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건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깍아내리고 자격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다. 실력이 확실한데도 굳이 자격증이나 학위가 있느냐고 시비를 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4. 일반적인 편지 서두에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해도 묻는 것은 안부나 건강이다. 이런 말을 하건 저런 말을 하건 간에 바울이 주로 쓰는 문안 인사의 골자는 무엇인가?

    은혜와 평강: 그것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이다. 이것이 건강보다 더 중요하고 요긴한 것은 건강한 생활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지?

    찬송: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는 말씀이 찬송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감격에서 나온 찬송없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6. 성도들이 은혜(하나님의 자유와 용서)와 평강(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이루어진 평화)을 누릴 수 있는 이유(근거)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기 때문이다.

7. 바울이 일차전도 여행 때에 들렀던 도시들은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이다(행 13:16-14:25). 이들을 한꺼번에 표현하는 말은?

    갈라디아 지방: 소아시아의 중앙 고원지대를 가리키는 곳이다.

8. 사도 바울의 말이 여전히 격하다(6-10). 본래 그런 성품이었을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여기서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격하고 험한 말을 할까?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좇기 때문에, 그것도 이같이 속히(6): 초대교회 시절에 이단(?)을 박멸하겠다는 일념으로 정신없이 뛰어 다니던 사울의 모습을 보라. 이 정도 말은 격한 편도 아니다.

9. 성도는 사람들에게 좋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 좋게 해야 하나?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동일한 경우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경우라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지만 형제를 기쁘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당연히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율법의 요구를 묵살하는 것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바울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10. 어떻게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만이 복음이고 다른 사람이나 천사가 전하는 것은 다른 복음 즉 이단인가?

    우리가 전한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계시를 받아서 전한 것이기 때문이다(11-12, 1:11-2:14). 그리스도께서 전한 것을 변하게 하는 것은 설령 천사가 전한다 해도 다른 복음, 즉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계시의 완성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성경에 맞지 않는 다른 계시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어떤 꿈이나 환상을 보아도 그것이 성경에 맞는 것인지 검증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맞지 않으면 다른 복음이다.

11. 바울이 유대교에 있을 때 가장 앞장서서 성도들을 핍박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조상의 유전에 대한 뜨거운 열심이었다(14):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었지만.

12. 과거에 자신이 행한 부끄러운 일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전한 복음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이렇게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내가 어떻게 변했겠는가? 나 스스로 변했겠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는가? 또, 새삼스럽게 율법을 문자대로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자신이 대선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13.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전혀 몰랐던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니 이게 자신의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출생을 포함해서 이 모든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4.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시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렇게 중요한 일에 대해서 왜 아무와 의논도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15.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아라비아(지금의 아라비아가 아니다. 당시에는 다메섹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메섹 근교일 수도 있다)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에 갔다가 3년 만에 예루살렘에 갔단다.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사도된 것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이나 회의에서 된 일이 아니다. 게바와 야보고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때 바울을 사도들에게 인도한 사람이 바나바이다.

16. 수리아는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가 있는 곳이며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 다소가 있는 곳이다. 이 지역에 오랜 기간 머물며 사역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음을 말하는 셈인데 핵심은 뭘까?

    예루살렘이나 다른 사도들과 별로 상관이 없었다는 말이다.

17. 야고보는 행함에, 갈라디아서는 믿음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무슨 차이일까?

    바울의 관심은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삶에 관심이 더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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