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장


1.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사역을 한 후 떠났던 1차 전도여행 기간은 약 4년이다(AD 46-49). 이 여행 말미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행 15:1-5). 이것은 바울이 회심한 후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다(첫번째는 행 9:26, 두번 째는 행 11:30). 그러면 14년 중 나머지 기간에는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참고 행 9:26-30, 11:25-26)

    다소에서 은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반발이 하도 거세서 고향으로 보냈는데 적어도 7-8년을 조용히(?) 지냈다. 실제로 그렇게 조용히 지낼 바울이 아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고향 주변, 즉 길리기아 지방에 많은 교회들을 세웠다고 본다(1:21-24, 행 15:41: 1차 전도여행지가 아님에도 교회가 이미 있었다는 것은 이 기간 중에 바울이 여기에 교회들을 세웠다는 뜻이다).

2. 전도여행이 끝나면 파송지(안디옥)로 돌아오는 게 정상일텐데, 바울 일행은 왜 예루살렘으로 갔을까? (참고 행 15:1-5)

    계시를 인하여(2)? 사도행전에 따르면 말씀의 해석문제 아니었나? 성령의 지시하심에 따라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았지만 바울은 그것이 성령의 계시를 따르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말씀에 대한 해석문제로 교회가 이들을 예루살렘으로 파송했지만 그것이 성령의 계시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인간적인 동기로 하지 않았다는 확신의 표시이기도 하다.

3. 복음을 제출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도들에게 검증을 받았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이 공인된 것이라는 뜻이다.

4. 유명한 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제출하고 검증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전의 어떤 경험과 관련이 있을까?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전에 헛되이 열심 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을 전부 잡아다 죽이려고 눈이 뻘개서 설치든 그 노력 말이다.

0. 만약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나와 동행했던 이방인인 디도에게 사도들이 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겠는가?

5.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난 얘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디도가 할례받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만약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사도들이 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겠는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다.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 받으라고 하지 않은 주체는 바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일 수도 있다.

6.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할례를 행치 않았다고 한다(5).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도 안의 자유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할례를 행하는 것, 곧 율법에 따르는 것은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이요(5),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16).

7. 할례 행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단호하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인가? 즉 할례와 무엇이 대조를 이루는가?

    믿음(16).

8. 복음에 관한한, 나는 유명한 이들에게 꿀릴 것도 없다.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가진 복음이 저들이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명하다는 것도 사람의 외모일 뿐 하나님께서 취하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아니다. 편의상 유명하다는 말을 사용할 뿐이다.

9. 바울이 무할례자의 사도가 된 것은 무엇과 같은 일인가?

    베드로가 할례자의 사도가 된 것: 바울의 사역(복음)이나 베드로의 사역(복음)이 동일한 것임을 사도들이 인정했다고 말하는 셈이다.

10. 바울이 야고보, 게바, 요한과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는 것이 무슨 자랑인가?

    자랑이 아니라 그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누가 시비를 거느냐?

11.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동행하실 때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다(마 17:1, 막 13:3, 막 14:33, 눅 8:51). 그런데 여기서는 왜 순서가 야고보, 게바, 요한일까? 베드로는 없나?

    바울이 마음대로 서열을 바꾸었을 리는 없고, 아마도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에 따른 것 같다. 단, 야고보는 다른 사람이다.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는 일찍이 순교했고(행 12:2),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다(야고보서의 저자). 게바는 아람어로 베드로(헬라어)보다는 유대인들에게 더 친숙한 이름이다.

12. 유명한 사도들이 내게 부탁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뿐이었다. 왜 불만인가?

    복음의 내용이나 사도권에 대해서는 비난받거나 잘못을 지적당한 적이 전혀 없었다.

13. 바울이 대선배이기도 하고 수제자이었던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다니 그럴 수 있나? 무슨 큰 잘못이 있었길래 그랬는가?

    외식: 이방인과 식사를 해놓고도 하지 않은 척 하는 것(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없다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고). 예수께서 피흘리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어진 상태에서 그런 구분을 타파하는데 앞장 서야할 베드로(행 10:15)가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책망을 할만큼 사도 바울의 사도권도 확실했다는 의미이다.

14. 바울이 ‘베드로가 유대인답게 살지 않는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았다’고 하는데 무엇을 가리켜 그렇게 말하는 걸까?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문맥을 따라서 추측을 해보자)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지 못하는 것이 유대인의 율법이요 관습이었는데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했다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주의를 버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그런 율법을 따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율법주의자들을 주장을 염두에 둔 발언인 것 같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바울의 자랑이 아니라 베드로를 책망할만한 자격, 즉 동등한 사도권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5. 베드로가 취한 행동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무슨 상관이길래 바울이 이렇게 열을 내는가?

    베드로가 취한 행동은 율법주의자들의 비난을 두려워한 것이다. 왜 믿음대로 하지 않고 율법을 따르느냐는 책망이기 때문이다.

16. ‘우리는 유대인이요 이방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이며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유대인은 율법을 가졌기 때문에 이방인과 달리 구원받은 백성인 줄 알았다(15). 그런데 알고 보니 율법으로 완전치 못하더라. 그래서 우리도 예수를 믿었다(16).

17. 율법은 행위이다(16절 a, e). 그러면 믿음은?

    은혜다: 믿는다는 것이 무슨 행위나 권리나 자격 충족이 아니라 그것을 근거로 의롭다고 여겨주시기 때문이다.

18.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그러면 율법의 의미는 무엇인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 혹은 예표였을 뿐이다. 그 당시에 율법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애를 썼을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이유는 오실 메시야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그나마 그것이 최선이었는데 이제는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께서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의 행위가 필요치 않다.

19. 주제가 바뀌었나? 처음에는(1:1-2:14) 사도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같았는데 여기서는(2:15-21) 느닷없이 믿음의 문제를 말하는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 사도권을 의심케 한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이 사도권에 대한 변호이기도 하고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20. 17절은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율법을 지키던 사람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적용해보면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뜻 아닐까? 그러면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인가? 왜 그럴 수 없다고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온전하게 의롭게 할 수 없는 율법이 그런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한 이상 율법은 더 이상 능력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율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의롭게 하시는 것이다.

21. 바울이 헐어버렸고, 결코 다시 세우지 않으려는 것이 무엇인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무슨 죄를 짓게 되는가?

    율법, 하나님에 대한 배신: ‘범법한 자’라는 말은 ‘배신자’의 의미가 강하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자를 의미한다(↔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

22. 바울과 율법은 어떤 사이인가?

    죽은 사이: 헤어진 정도가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는 죽은 상태다. 죽은 자식을 아무리 달래고, 만져도 소용없는 것처럼 율법과의 관계는 끊어졌다. 대신에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났다.

23. 20절은 바울의 위대한 고백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 곧 ‘예수와 하나됨’이다. 다음과 같이 고칠 때 (      ) 속에 알맞은 단어는(21절을 참고로 해서)?

    ‘과거의 나는 죽었습니다. 이제 살아있는 것은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사울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살아났습니다. 어떻게 해볼 수 없던 옛 사람은 죽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변화된 것은 예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이제 살아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이 할 수 없는 일을 (       )이 가능케 하였습니다.’

    율법, 믿음

24.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기 위하여 어떤 주장이나 예를 들고 있는가?

    1) 복음을 사도들에게 제출하여 검증을 받았다(2).
    2) 만약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나와 동행했던 이방인인 디도에게 사도들이 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겠는가(3)?
    3) 복음에 관한한, 나는 유명한 이들에게 꿀릴 것도 없다. 이유는 내가 가진 복음이 저들이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
    4) 내가 무할례자의 사도가 된 것이나 베드로가 할례자의 사도가 된 것이나 동일한 역사이다. 그들이 인정했다(7-8).
    5) 유명한 사도들이 내게 부탁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뿐이었다(10). 복음에 대해서는 비난받거나 잘못을 지적당한 적이 전혀 없었다.
    6) 오히려 수제자이었던 베드로 책망하기도 했다(11-14).
    7) 유대인이요 이방죄인이 아님에도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율법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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