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


1. 자유를 주셨는데 왜 멍에를 맬까?

    진정한 자유가 뭔지, 멍에가 뭔지도 몰라서: 자신이 메고 있는 것이 멍에인지 자유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육체의 일이라고 말한 음행이나 우상숭배를 행하는 자는 그것을 멍에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지, 혹은 자유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나 담배를 즐기는 사람은 그것들을 즐기는 것이 자신의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자유라기보다는 멍에이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멍에이다. 반면에 형제를 사랑하여 스스로 섬기는 자세가 언뜻 보기에는 종처럼 보일지라도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인 반면 율법이 주는 자유는 멍에이다.

2.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인 징표로 생각했다. 예수님도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바울도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 했다(행 16:3). 그런데 여기서는 왜 할례를 무슨 원수같이 취급하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할례는 할례 자체가 아니다. 할례가 단순한 할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3, 4)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하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2). 그 분이 율법의 요구를 우리 대신 다 이루셨다. 단지 그것을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도록 하셨다. 디모데의 경우는 할례가 의롭게 되는 것과는 아무런 영향도 없지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 유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3. 어두운 밤에는 촛불이 유용하지만 해가 뜨고 나면 오히려 거추장스럽거나 불편할 뿐 아니라 잘못하면 위험하기도 하다. 촛불이 할례라면 해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 영원히 꺼지지 않을 태양 앞에서 촛불을 애지중지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할례를 받으려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한다는 것은 할례가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믿음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4.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의 구별이다. 사람과 짐승(이방인)에 대한 구별이었다. 이제는 무엇이 그렇게 구별하는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6):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든지, 믿지 않음으로 버림을 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할례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 그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5.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을 바울은 어디에 비유하고 있는가(2 가지)?

    경주 도중에 나타난 훼방꾼(7): 100m 달리기나 400m 계주 도중에 뛰어든 방해자를 생각해보라. 율법주의자들은 그런 끔찍한 비난을 뒤집어 써야할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누룩(9): 작지만 전체를 변질시키는 위험한 존재들이다.

6. 느닷없이 누룩은 왜 등장하는가?

    그릇된 가르침은 작은 누룩이 온 덩이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위험하다는 비유이다.

7. 설득하기 위해서 사실을 사실대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다른 요인을 여기서 찾는다면?

    믿어 주는 것(10, =일종의 격려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일 때가 훨씬 더 많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보다 그 사람에 대한 호, 불호가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너희를 믿노라’는 격려도 성도들이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8. 바울의 말을 다음처럼 고칠 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무엇인가?

‘내가 십자가의 도를 전하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고난을 받는 것이 할례 때문이 아니냐? 내가 할례 때문에 온갖 고생을 다 당하면서도 그렇게 주장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 그 자식들더러 할례가 그렇게 중요하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껍질만 베지 말고 아예 잘라 버리라고 그래라.

9. 목표가 종노릇이라면 자유를 주긴 왜 줘?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고 해놓고 서로 종노릇하라니(13)?

    자발적인 종노릇은 기쁘다. 종이라서 해야 하는 일은 고달프지만 자원해서 종노릇하는 일은 서로를 세운다. 종과 같은 마음으로 남을 섬기면 쉽게 몸과 마음이 상하지만 자유자로서 형제에게 종노릇하는 것은 서로를 건강하게 만든다.

10. 육체의 기회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만을 따라 사는 것: 우리나라에 자유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 옆 사람을 툭 쳐놓고 왜 때리느냐고 따지면 ‘내 자유다’ 했던 때가 있었다. 이건 자유가 아니라 자유의 남용인 셈인데 차라리 육체의 기회인 셈이다.

11. 예수님은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는데(마 22:37-39) 바울은 왜 한 가지만(14) 말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없이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봐도 될 것 같다.

12.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을 원어상으로 보면 ‘성령과 함께 걸으라’는 말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과 함께 걷는 것일까?

    내 뜻대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 분의 뜻대로 가는 것: 지속적이면서도 순간순간 동행하는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다. 죄성에 물든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내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를 힘입어 사는 것이다.

13. 할례와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형제사랑(13-15)이나 성령을 좇아 행하라(16-18)는 말이 왜 나오는가?

    갈라디아 성도들 중에 서로 물고 물리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15). 아마도 할례 문제로 인한 분쟁이 있었을 것이다. 자기의 주장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면 자연스레 율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분쟁이 사라질 것이다(18).

14.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 속의 죄악된 본성이 깨끗이 사라지고 선하게 되는 것 아닌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우리 안에서 서로 대적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17): 선을 행하려 하면 육체가 나서고, 악한 마음을 품으면 성령이 책망한다(롬 7장).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지배받도록 우리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겨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나도록 하실 것이다(롬 8장).

15. 사람들이 지을 수 있는 죄의 항목에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드는 죄는 어떤 종류의 죄일까? 모든 죄의 선두 주자라고도 할 수 있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음행: 성적 문란이 모든 죄의 근원이 될 수 있다.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시는 죄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사랑이 변질된 것이 곧 음란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바꾸어버린 죄이다.

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믿음으로 사는 것)과 율법 아래 있는 것(자신의 의로 사는 것)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8). 그러나 실제로는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킨다는 안식교인들은 도덕적으로 보면 훨씬 더 믿을만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육체의 일(19-21)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 아닐까?

    19-21에서 언급한 행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자들이 행하는 행위의 예 일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 도덕적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도덕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든 자들이기 때문이다.

17. 성령의 열매 9가지를 하나로 압축한다면 사랑이 될 것이다. 사랑이 있어야 다른 8가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다른 8가지가 어떤 관계인지 다음처럼 생각해보자. ‘사랑의 결과로 (    )과 (    )을 누린다. 사랑없는 (    ), (    ), (    )는 스트레스다. 사랑없는 (    )와 (    )과 (    )은 위선이다.‘

    사랑의 결과로 희락과 화평을 누린다. 사랑없는 오래 참음, 온유, 절제는 스트레스다(자신의 내면을 향한 미덕). 사랑없는 자비와 양선과 충성은 위선이다(타인을 향한 미덕).

18.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죽였다는 말이다.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바울은 이것을 롬 6:11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 죄에 대해서는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관심도 흥미도 없다. 불신자들과 우리가 흥미로워 하는 것이 같은가, 다른가? 우리는 어디에 관심이 더 많은가?

19. 성령으로 산다는 것과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을 가리키는가?

    육체를 따라 살지 않는 것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 서로 격동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 것(24, 26의 역):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방언을 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재산을 아까운 줄 모르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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