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 장


1. 홍수로 인한 심판을 사람들은 잊어버렸을까? 잊지 않았을까?

    심판이 일어난 이유는 잊어버렸고, 심판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원인은 잊어버리고 결과만 기억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수련회 다녀와서 우스운 이야기만 기억하고 정작 중요한 내용은 잊어버린다? 아버지가 매를 든 이유는 잊어버리고, 맞았다는 사실만 기억하는 것도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2. 탑을 쌓는 것이 잘못인가? 높이 올라간 것이 잘못인가? 이름을 낸 것이 잘못인가? 무엇이 제일 문제인가?

    탑을 쌓는 일이 잘못이라기보다는 동기에 문제가 있다. 하늘에 닿게, 우리 이름을 내자, 흩어짐을 면하자. ↔ 편만하라, 충만하라,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있거나 아니면 잊어버렸거나.

3. 바벨탑을 쌓은 동기는 몇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특히 왜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을까? 왜 그것이 하나님을 노엽게하는 이유가 되는가?

    충만하라,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대한 고의적인 반역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셨을 지라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크다. 심판만 기억하고 심판받은 인생을 불쌍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기억하지 않고 있다.

4. 홍수 이후 사람들이 차츰 번성하고 있을 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가 나타난다. 한군데 모여 거대한 탑을 만드는 작업은 개인의 주체적인 결단이 무시되는 전제군주적인 권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런 전제군주적인 사람의 나라는 ‘땅을 정복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울리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야심가들이 온 세계를 자신의 권력 밑에 두기를 원했으며 세계적인 단일 국가를 꿈꾸어 왔던가? 다른 민족을 점령하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전제군주의 노력이 (          ) 때문에 얼마나 방해를 받고 있는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방법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생각해보자. 한 명의 독재자가 모든 민족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려고 할 때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일까?

    언어의 혼란: 하나님의 의도는 개인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다(중앙 집중식이 아닌 개별 난방식처럼). 터어키나 이라크에 흩어져있는 쿠르드족이 그렇게 수난을 당하면서도 쉽사리 각 나라에 동화되지 않는 것은 다른 것도 있겠지만 언어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언어의 혼란은 이런 전제군주의 출현을 막기 위한 기막히는 하나님의 작전이라고 여겨진다. 교회사에서도 흩어지라는 데 흩어지지 않고 똘똘 뭉쳐 있다가 두들겨 맞은 예가 신약에도 있다. 초대 교회에 대한 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5.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온 세상 사람들이 힘을 합쳐 쌓는 탑을 어떤 방법으로 막겠는가? 번개와 천둥으로 때려버려? 지진으로 뭉개버려? 지도자급만 골라서 유배를 보내버린다? 하나님의 방법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였는가? (     )로 사회를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소설에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84’, ‘동물농장’의 저자 조지 오웰이다. 20세기에 와서 겨우 생각해 낸 기발한 아이디어가 성경에는 거의 3,000여 년 전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

    언어: ‘1984’의 주인공은 절대자 ‘Big Brother’의 통치에 장애가 되는 사상을 표현하는 단어를 모든 문헌에서 제거하는 일을 맡고 있다. 단어를 모두 없애고, 사용을 금하면 동시에 사상마저 사라진다는 것이다. 북한에는 자유라는 단어가 없거나 있다면 아주 나쁜 의미일 것이다. 우리와 같은 자유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를 배우게되면 그런 개념이 반드시 도입될 수밖에 없고 체제에 위험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의 단어가 없으면 그런 자유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독재정치가 수월해 지는 것이다.

    (더 생각해 볼 일) 어머니와 아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했다. 그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날까? 언어학적인 대답은 이렇다. 아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한 불가능하다. 언어가 사람의 행동이나 감각에 영향을 줄까? 미국 사람들은 뜨거움과 매움을 구별하지 못한다. 단어가 구분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어가 구분되어 있으면 그 차이를 저절로 안다. 컴퓨터를 통한 자동번역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까? 아주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것은 가능하겠지만 미묘한 차이나 서로 다른 개념은 번역이 불가능하다. 언어가 얼마나 복잡미묘한 것인지 아는 사람에게는 바벨탑의 언어혼란이 놀랍도록 충격적이다!

6. 인류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언어가 있다(6,809 Ethnologue. 2000년 1월). 진화론자들은 언어도 진화과정에서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래서 최초의 언어가 무엇일까 하고 각 언어의 공통점을 찾고 연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각각의 언어에는 진화로 설명할 수 없는 근본적인 간격이 무수하다. 가령 우리나라 말은 조사(토씨)를, 영어는 순서를 중시하고 어떤 언어는 어미변화를 이용하고... 그러다가 비교언어학은 진화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라고 하면서?

    언어와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언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하는 생물이다. 그러나 생물이 한 종 내에서 변이는 가능하나 다른 종으로의 변화는 불가능한 것처럼 구조가 거의 비슷한 어족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언어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서 공통분모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혼란케 하시지 않았으면 이렇게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도록 구조가 달라질 수 없다는 뜻이다. 점진적으로 변화했다면 언어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성경번역선교회(GBT) 자료에 따르면 성경번역이 필요한 언어가 아직도 3,000여 개란다. 신구약이 전부 번역된 언어가 371, 신약만 960, 일부 번역된 것이 902, 현재 번역이 진행중인 언어는 1,500 개이다. (1999년 12월 기준)

    하나님의 지혜가 작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언어가 이렇게 갈라졌을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7. 언어는 진보하고 있을까? 퇴보했을까?

    퇴보:

    1)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만 해도 숨의 강약을 나타내는 방식이 ‘ㅇ’ → ‘ㅎ’ 사이에 두 가지나 더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전혀 구별하지 못한다. 언어는 점점 단순화하고 있다. ‘ㅇ’은 소리가 나지 않는 자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처음에 한글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목구멍을 통과하는 숨의 양이 가장 작음을 의미하는 글자다. 단계적으로 강해지는 것(ㆆ, ㆁ, ㆀ, ㆅ)을 나타내다가 가장 강한 글자를 ‘ㅎ’으로 표시한 것이다.

    2) 고대 언어가 현대 언어보다 변화가 훨씬 더 심하고 어렵다. 배우는 우리에게는 엄청나게 복잡한 변화이지만 그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는 전혀 그런 변화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고 자연스러우면서 배우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전(?)이 아닐까?

8. 다음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해석은?

    600 → 438 → 433 → 464 → 239 → 230 → 148 → 205 → 175 → 180 → 147 → 137 → 133 → 137 → 120 → 110 → 98 → 70

    홍수 이후의 나이 변화: 자연에 심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서서히 줄어든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줄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아래 도표를 참조).

9. 인류의 범죄로 말미암아 언어가 혼잡해졌지만 모든 죄를 용서받은 낙원에서는 다시 언어가 통일될 것이다. 그 예를 신약에서 찾아본다면?

    성령 강림 이후 방언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당시의 모든 외국인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각 나라 사람이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을 할 지라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행2:4-12, 계7:9) 묘한 언어의 통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어교사는 어떻게 하지? 성경교사도 필요 없어질 텐데...

    천국의 언어는 한국어라고 주장하여 수많은 외국인들이 천국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한국을 찾는다고 한다.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국을 빛낸 인물에 들어갈까 두렵다! 통일교 얘기다.

10.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만들어 주면 많은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가 있다. 가령 선거에서 학연, 지연, 혈연을 이용하여 몰 표를 얻는 방법도 그런 예가 될 것이다. 모래에 자석을 갖다대면 모래 속의 쇠붙이만 딸려 나오듯이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으면 사람들이 아무리 뒤섞여 있어도 상황에 따라 무서운 단결력을 발휘할 수 있다. 바벨의 사람들이 하나로 단결하여 반역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가?

    한 언어(1, 6), 한 민족(6)

11. 예수님 이후에 주연배우가 된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면서 등장하게 된다. 그가 주동이 된 핍박을 피해서 신자들이 흩어졌지만 결국은 그만큼 복음이 널리 퍼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가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으니 핍박이라는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복음을 널리 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11장의 어떤 점과 유사한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9:7)는 명령을 무시하고 흩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언어의 혼란이라는 쓰라린 매를 맞고 흩어짐.

12. 다음 도표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연도별) 표 범례 < 파란색:출생, 초록색:첫 아들 낳은 나이, 붉은색:사망 >

    (나이별)

    노아와 셈은 그 후손들이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것과 데라와 비교한다면 자기 나이의 ⅓밖에 안되면서 같이 늙어 가는 것을 목격했다.

    홍수를 체험한 노아가 살아있는 동안에 사람들이 홍수의 원인과 참상을 잊어버리고 바벨탑을 쌓았다. 아, 끔찍한 인생! 6.25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대하여 치를 떨지만 그 다음 세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하게 듣지 않는다. ‘머 그럴라꼬!’ 하면서. 바벨탑 사건이 터질 때 노아가 살아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노아의 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었던 이유가 그 장본인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몇 세대만 지나면 신화가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일부에 의해 정확하게 전해질 수가 있었을 것이다. 구전으로 전해졌는지 자료가 있었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구전으로 전해졌다면 어떻게 정확하게 전해졌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판소리 완창에 6시간이 걸린다고 하던가? 음정, 박자, 가사, 추임새까지 정확하게 배워서 그대로 부른다는 것이 불가능한가? 특별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길고 긴 것이 정확하게 전달이 된다. 같은 원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히브리어 성경은 단순한 기사가 아니다. 판소리보다 더 아름답고 그레고리안 챤트보다 더 감미로운 음악이다. 그래서 모음도 없이 자음만으로 표기되었음에도 정확하게 전달이 되었던 것이다.

    지구의 환경이 바로 나빠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악화되었던 것 같다. 수명은 성장한 이후의 환경보다는 태어날 때의 환경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더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다. 가령, 일벌이나 여왕벌은 다 같은 암펄이다. 차이는 여왕벌은 애벌레 때 로얄제리를 더 먹는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여왕벌은 몇 년씩 살지만 일벌은 길어야 수 개월이고 일을 많이 할 때는 한, 두달에 불과하다. 사람도 태중에서 나쁜 영향을 받는 것은 작은 것일지라도 치명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홍수 후에 태어난 세대는 조기출산의 모습과 절반 정도로 수명이 단축되었음(1차)을 알 수 있고 세상이 나뉘었다는 벨렉 때 또 절반 가까이 단축되었음(2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끔찍한 변화가 계속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이후는 서서히 줄어서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인생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형벌의 모습으로 오래토록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구원의 역사를 그만큼 빠르게 진행시키시려는 의도가 아닐까?

    ▣ 노아는 홍수 이후 350년을 살았는데 환경 변화의 영향이 별로 없었다. 나이가 많이 든 분이 좀 더 오래 살겠다고 건강식을 하고 담배를 끊어도 별로 영향이 없는 것에 비기면 되지 않을까?

    ▣ 셈은 홍수 이후 500년을 살았는데 그 이전 세대에 비하면 300년 정도 줄었으니까 홍수 때에 있었던 환경변화의 영향을 제법 받은 모습이다.

    ▣ 홍수 직후에 태어난 아르박삿, 셀라, 에벨은 약 500년 정도 수명이 단축되었으니 홍수 때에 생긴 변화가 인간의 수명을 절반으로 줄인 셈이다.

    ▣ 세상이 나뉘었다고 하는 때에 태어난 벨렉, 르우, 스룩은 또 절반 정도 줄었으니 이 때에 또 한번의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아브람이 고향을 떠날 때도 노아가 살아있었다. 노아가 맡은 임무대신 새로운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사람을 선택해서 일을 시작하셨다.

13.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였다(12:4). 행 7:4에 의하면 아브람은 최소한 데라가 130세 이후에 낳은 아들이다. 아브람이 맏이일까? 맏이가 아닐 가능성을 찾아보시오.

    하란이 세 아이를 낳고 먼저 죽은 사실로 보아 하란이 맏이일 가능성이 많다. 하란의 딸 밀가가 작은 아버지 나홀과 결혼한 것도 나홀이 하란보다 나이가 훨씬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아브람이 롯과 나이 차가 적거나 롯이 많을 수도 있다. 아브람이 주인공이 되다 보니 먼저 쓰게 된 것 아닐까? 롯의 결혼 이야기도 없다. 나홀은 분명히 아브람의 동생이다(24:48).

14. 아브라함의 위대함을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다는 증거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히11:8)’을 든다. 그러나 그 순종에 몇 가지 흠이 될만한 요소를 찾아보자.

    목적지가 분명히 가나안이었다(↔히11:8). 그리로 가려고 한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바로 가지 않고 하란에 오래 거하였다. 가나안으로 여행할 때 하란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마지막 국경 도시이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다른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쉽게 국경을 넘지 못했다는 말이다. 마지못해 떠나간 측면이 더 강하다. 아브람의 순종도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 진 십자가’이다. 시몬은 그날 얼마나 욕을 했을까? 그냥 구경삼아 머리를 디밀었다가 촌놈에 힘깨나 쓰겠다 싶은 탓에 붙들려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 욕을 했거나 말거나 그로 인해 그의 아들(루포)는 신약시대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결코 아브람이 신앙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것이 아니다(수24:2). 멱살 잡힌 채 끌려갔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의 작품이다!

15. 데라의 가족 관계를 도표로 그려보시오(11장, 22장).

16. 데라의 가족 중에서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한 사람과 고향을 떠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해보고 느낌을 말해보자.

    나홀은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데라가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 어쩌면 가족 간의 의견일치를 볼 수 없으면서도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일가족이 북한을 탈출해서 대만에 남자 한국으로 가자고 해서 고민하던 이만철씨 가족을 생각해 보자)

17. 11:27-11:32에서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를 찾아보시오.

    하란(인명이면서 동시에 지명)

18. 가나안으로 가려고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의 아브람은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대단히 실패한 인생이다. 실패라기보다는 무능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 때문에?

    일부다처 사회에서 한 아내를 두고도 가장 중요한 아들이 없었으니: 지금도 한 남자, 한 여자에게 평생 순결을 지키며 살려는 사람을 존경하기보다는 못난 사람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19. 북한의 나진, 선봉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몹시 노력한 끝에 겨우 승낙을 얻어냈단다. 그것도 십자가를 붙이지 않고 공장의 한 부분만을 교회로 쓰기로 조건을 달고. 그것마저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하면서 북한 선교를 위하여 기금을 조성해 둔 어떤 교회에 교회건축을 위한 헌금을 요청했다가 거절을 당했단다. 이유는 회사 공장의 일부가 아닌 곳에 십자가를 당당하게 세운 교회를 짓겠다는 것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렇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무서운 죄악이 도사리고 있다. 그 죄가 무엇인지 본문에서 찾아보자. 북한 당국에서 그런 교회를 허락할 턱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고집을 부리면서 찾아온 기회를 무산시킨다는 것은 교회 건축을 주님을 위해서 하려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자기 이름을 내려는 죄악: 북한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기금을 마련하고 많은 돈을 적립해 둔 교회는 많다고 한다. 바람직한 일인지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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