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 장


1. 성경의 장, 절을 가르고 모음 표시를 한 사람들은 맛소라 학파라고 불리는 유대인 학자들이다. 주후 5세기 말경부터 시작해서 본문을 정확하게 전승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인쇄술이 발달될 때까지 했다. 그런데 1장과 2장은 아무래도 잘못 가른 느낌이 든다. 어디를 갈라야 옳을까? 이유는? (자유롭게 이런 생각을 가질 필요는 있으나 이것을 이렇게 나눈 사람들의 노력마저 부정하자는 뜻은 아니다.)

    2:3과 2:4절 사이: 아무래도 2:1-2:3은 1장의 내용과 더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천지창조의 마지막 날을 설명하는 것이니까. 반면에 2:4 이하는 인간창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 하나님은 피곤하실 이유가 없다. 왜?

    말로만 창조하셨으니까(1점): 말도 많이 하시지 않았다.
    피곤을 느끼는 육적인 존재가 아니다(2점). 연약한 육체를 지닌 우리 인생을 위해서 이런 주기를 만드셨다. 주일의 개념이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며칠 일하고 며칠 쉬었을까?

3.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피곤해서?

    만드신 것, 특히 사람을 즐기며 감상하고 기뻐하는 것: 하나님은 피곤해서 쉬실 이유가 없으신 분이다. 안식일이 확장되면 안식년이 되고 안식년이 확장되면 희년(禧年)이 된다. 공통점은 기쁜 날이다. 하나님의 안식이란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희년이 확장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다. 창조세계를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 진정한 안식이다. 예수님께서 폐지시켜버린 것은 이런 기쁨없이 ‘일하지 않는 것’만이 안식일이라고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고정관념이었을 뿐이다. 일하지 말라는 것은 대회(성회)로 모이기 위함이었다(레위기 23:7, 8, 21, 24-25).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는 것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안식을 아담이 깨어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일을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신다고 하셨다(요 5:17). 그 일은 구원역사를 가리킨다. 자기 백성이 온전히 구원을 받기까지 하나님의 안식은 보류된 상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요리문답 제 1 번에서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한다. 천국 가면 맨날 예배와 찬송만 드린다면 얼마나 따분할까?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는, 옆에만 있어도 좋은, 그렇게 흥분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곳이 천국이다. 천국을 편안히 누워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 오해다. 천국에 갔더니 자기 문패가 붙은 대궐 같은 집이 있더라고 하는 사람은 성경공부를 좀 더 하고 갔다올 일이다.

4. 한자의 아주 기본적인 것들은 창세기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한자를 처음 만들었던 사람들이 창세기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만들 조(造)자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 지 빈 곳을 채워보자. 만들 조(造) = 土(흙) + 口(사람) + 辶(움직임=생령) + ____(생기)

    丿(생기): 사람과 짐승의 근본적인 차이가 이것이다. 이 생기(영혼) 때문에 사람은 육체라기보다는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5. 1장과 비교해보면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

    창조의 순서, 남자와 여자의 창조, 하나님의 이름: 2장은 창조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중심주제인 사람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여자 창조에 관한 내용을 다르다기보다는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2:4부터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부른 문서(1:1-2:3)와 ‘여호와’라고 부른 두 가지 문서가 혼합되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소위 문서설이 한 때 신학의 주류를 이루기도 했지만 고고학이 발달하면서 많이 퇴색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창조주요, 심판자적인 모습일 때는 ‘엘로힘’이라는 이름(공식적인 명칭?)이 사용되고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친근한 분으로 나타날 때는 ‘여호와’란 이름(사적인 명칭?)이 사용되었다.

6. 1장의 창조 순서와 약간 달라 보이는 점이 있다. 무엇이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cf)우리나라의 중심지는 어디일까? 답을 서울이라 하니까 서울은 우리나라의 한쪽에 치우쳐 있다고 반론이 생겼다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 지를 생각해보자.

    서울은 지리적 중심지가 아니라 행정적 중심지이다. 즉 1장은 전체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했다면 2장은 사람의 창조를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다: 동일한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반복해서 기록한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기록조차 있다(가령, 노아 홍수 때 방주에 들어온 짐승의 숫자 같은 경우). 우리의 독해력이 부족하거나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나 사고유형의 차이에 따른 지식이 부족해서 달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조점이 다르거나 관점이 다를 때 조금씩 다르게 되풀이하는 것은 히브리 문학의 한 양식이다.

    전형적인 예가 여호수아 3, 4장의 요단 강 건너는 사건이 세 번, 출애굽기의 유월절 기사도 세 번이나 반복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서로 내용상 차이가 있을 때 이것이 여러 가지 자료들을 편집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만 누가 여러 가지 자료들을 모아서 하나의 글로 만들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글을 그대로 연결시키겠는가? 적절하게 문맥을 다듬는 것이 정상 아닐까? 아니면 성경을 편집한 사람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무식한 사람이란 말인가?

7. 사람의 구성성분은 뼈와 살이라고 하면 되지만 그것은 초등학교 수준의 답일 뿐이다. 중, 고등학교 수준이면 C, H, O, N과 같은 원소를 주로 하여 각종 무기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답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이 기록될 때에는 이런 단어나 개념이 없었고 거의 대부분의 원소가 자연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에 와서야 발견되고 이름 지어졌다. 그러면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이러한 각종 원소와 무기물들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했을까?

    흙: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이들이 흙으로 장난감 만들 듯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고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다. 사람을 만든 재료는 원어상으로 ‘아다마의 아파르(흙의 먼지)’인데 동물을 만든 재료는 ‘아다마(흙)’이다. 우리말로는 둘 다 흙으로 번역이 되었으나(개정판에는 ‘땅의 흙’이라고 함)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아파르’는 더욱 미세한 흙 알갱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원소를 따지자면 흙이라고 할 수밖에 없음에도 3,000여 년 전에 기록된 고대문서가 그 차이를 두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동물의 세포나 질이 사람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과학자의 연구 결과가 놀라울 뿐이다.

    현재까지 주기율표에 공인된 원소 기호는 111개이지만 자연계에 존재하는 천연 원소는 H(수소)에서 U(우라늄)까지 92개다. 나머지는 인공원소로 반감기가 수백분의 1초밖에 되지 않아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 중에서 흙의 원소는 86종이고 나머지 6종은 기체 상태로만 존재한다(주기율표 18족의 헬륨, 네온, 아르곤, 크립톤, 크세논, 라돈).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면 사람의 원소는 흙의 원소 86종보다 적어야 한다. 인체를 구성하는 필수 원소는 25종이며 미량원소가 대략 22종으로 총 47종이다(국민일보 05. 6. 18).

8.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과정을 보면 사람은 어떤 두 가지의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영혼(하나님의 생기)과 육체(흙): 우리에게는 두 요소 중에 어느 것이 더 크게 작용하는가? 우리는 육적 존재인가, 영적 존재인가? 육체적인 요소보다 영적인 요소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9. 6:2에 보면 홍수의 원인을 사람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원래는 육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우리는 무엇인가?

    생령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만들어진 살아있는 영)
    살아있는(=육체가 있는) 영적인 존재: 범죄한 이후 우리에게서 영적인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육적인 존재 즉 짐승이 될 수도 있고 영적인 존재 즉 거룩한 삶을 살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10. 생령이란 육적인 존재인가? 영적인 존재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육체가 있으되 영처럼 움직이는 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닫혀 있는 문을 열지도 않고 들어오신 것은 분명히 영인데 귀신인줄 알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찾으신 것은 육체가 있음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각종 초능력이나, 영력이 있는 사람은 잃어버린 우리의 옛 모습을 조금 더 가진 사람 아닐까? 사람도 때로는 특별한 상황에서 평소에 볼 수 없던 정신력을 발휘하는 것(괴력, 정신일도 하사불성)도 영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11. 아담에게 배꼽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혹은 닭이 먼저일까? 계란이 먼저일까?

    분명히 닭이 먼저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성숙한 모습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성숙창조론). 아담도 성숙한 청년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성숙한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면 배꼽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중요한 것은 배꼽의 유무가 아니라 성숙한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연대 측정은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막 눈을 뜬 아담의 겉모습은 20살을 넘은 청년이었겠지만 실제 나이는 하루밖에 되진 않는다. 아담이 눈을 뜨고 바라보는 나무들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묵은 나무들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며칠 전에 창조하신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수십억 년 되었다고 주장하는 지구 역사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렇게 밖에는 대답할 수밖에 없다. 아담에게는 배꼽이 있을 이유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창조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가 진흙으로 인형을 하나 만들었는데 누군가가 그것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다고 주장할 것은 뻔한 일이다.

12. 두 종류의 나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

    생명나무: 선악을 분간하는 능력보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훨씬 더 귀한 일이다: 아담과 하와 뿐 아니라 모든 인류는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나무만이 차고 넘친다.

13. 에덴 동산에서 시작된 강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보면 일반적인 강의 모습과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그려보자.

    일반적인 강: 나무 가지와 비슷하다.
    에덴의 강: 가운데 근원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강. 지금과는 현저하게 다른 모습의 지형을 암시하는 셈이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중심에 둔 천국의 모습에 대한 그림자인 셈이다.

14. 에덴 동산은 어디에 있었을까? 유프라테스 강이나 힛데겔(히브리어, 그리스어로 티그리스)이나 구스(홍해 남부의 양안(兩岸) 지역)란 이름을 보면 대충 짐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엄청나게 변해버린 지금의 세상에서 답을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학자들은 고대에 모든 육지가 한 덩어리이었다고 한다(판게아 대륙). 후에 이리저리 갈라져버렸으니 그 당시 지구 위의 위치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강이름을 근거로 이라크와 가까운 어떤 곳이 아닐까하고 추정도 하는 모양이다.

15. 에덴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는데 지킨다는 것은 훔쳐갈 사람이 있기 때문인가?

    훔쳐가지 못하게 지킨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께서 만든 이 아름다운 동산을 유지, 보존하라는 뜻이다. 영어로 Keep는 지킨다기보다는 유지, 보존시키다라는 뜻을 가진다. 우리말로는 동산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로는 garden으로 번역된 것처럼 원어는 ‘(울타리가 있는) 정원’이라고 한다.

16.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잘못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은 대단히 염치가 없는 사람이다. 왜 그런지 16절, 17절 말씀을 근거로 설명해보자.

    강조점은 16절에 있다. 그 모든 것을 즐기라는 것인데 하필이면 단 하나의 금지사항에 빠지는가? 그리스도인은 삶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두신 것을 즐기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심이기 때문이다. 너무 ‘하지 마라’에 관심을 쏟는 것은 옳지 않다.

17. 돕는 배필이란 조수란 뜻일까? ‘배필’이란 표현은 한국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들어간 말이다. 영어로 말하면 helper이다. 성경에는 이 단어가 또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

    하나님(신 33:29, 시 121:1-2, 118:6): 단어가 같아도 개념이 전혀 다를 수 있다. 한국말의 ‘약속’과 영어의 promise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도의 차이를 감안하면 같은 뜻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아내는 돕는 자이지만 결코 지위가 낮은 것이 아니다. 차라리 ‘하나님처럼 돕는 자’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18.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셨을까?

    교제의 대상이 필요함을 자신에게서 앎: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교제를 위함이었다는 사실은 자신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 (김성일 장로의 글에서). 반드시 그러하냐 아니냐를 떠나서 하나님의 마음 한 구석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19. 사람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어떤 언어라도 배울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언어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떤 말을 쓸까? 그것이 천국의 언어일까? 정답은 말을 배우지 못한다. 사람의 언어도 외부에서 주어져야 한다. 그러면 무슨 언어든지 배울 수 있다.

    진화론은 언어조차도 진화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생겼다고 한다. 사람의 구강구조가 말을 할 수 있도록 얼마나 설계가 잘 되어있는 지 알고 하는 소릴까? 잘 지어진 음악당은 사람의 구강구조를 본떠서 만들어진다. 사람의 입안이 소리를 만들고 증폭시키는 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입술, 치아, 치경(이빨의 바로 뒷부분으로 딱딱하면서 우둘투둘한 부분), 경구개(치경의 안쪽, 딱딱하면서 매끄러운 부분), 연구개(경구개 다음의 말랑말랑한 부분) 등으로 이루어진 깊은 곡선이 잘 설계된 말하는 장치이다. 본문에서 언어의 출발점도 하나님인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은 몇 절인가?
    19절: 하나님께서 마음에 정하신 데서 언어가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신 대로 아담이 이름을 붙였다. 언어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었다.

20.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데에 전제조건이 무엇일까? 가령, 컴퓨터가 초창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전자계산기로 불렸다. 주로 계산하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제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사물에 이름을 붙이려면 어떤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말해보자.

    대상의 본질과 특성을 파악하는 일: 컴퓨터를 우리말로 어떻게 불러야할지 난감하다. 이게 어떤 기계인지는 아는데 그에 걸맞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전뇌(電腦)라고 한단다. 성경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바꾸는 일이 종종 있다. 이름을 붙이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일생이나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나타내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나님께서 ‘나는 여호와라’라고 하실 때는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시겠다는 선언이다. 단순하게 이름만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모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거나 장래사까지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담이 모든 동물에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아담의 능력이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는 말이다.

21. 누가 ‘말’을 보고 ‘말’이라고 했을까? 우리 주변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게 하신 것은 누구인가?

    아담(1점), 하나님(2점): 1:5, 8, 10에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붙이신 것이 5개다(낮, 밤, 하늘, 땅, 바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먼저 사물에 이름이 있도록 의도하셨다는 점과 아담의 작품을 결재했다는 점에서 이름을 붙이는 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설리반이 헬렌켈러에게 글을 가르치기 전에 사물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을 먼저 깨우쳐야만 했다. 사물의 이름을 붙이는 일도 하나님의 주도 하에서 이루어진 것과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정하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2.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다면 우리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왜 그럴까?

    어휘가 딸린다(동물이나, 식물이나 몇 가지 이름을 댈 수 있는가?).
    이름을 붙여놓고도 나중에 헷갈리지 않을까? (무엇을 무엇이라고 이름 지었는지, 이름 붙인 놈과 붙이지 않은 놈을 혼동하지 않고 구별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
    사람은 평생 동안 두뇌의 3~5%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5%를 사용하는 사람은 천재란 말을 듣고 10%정도 쓴다면 아인슈타인 정도 된단다. 아담은 몇% 정도를 사용했으며 IQ는 어느 정도였을까? 수명이 무한대 → 1,000년 → 100년으로 줄어든 것처럼 우리의 두뇌 사용량도 그 정도 비율로 줄었다고 생각해보면 아담은 두뇌를 100% 사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담의 IQ가 100이라면 우리는 5~10이라는 말이다.
    문명이 발달했다고 인간들아 교만하지 말아라.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법칙들을 겨우 하나씩 발견해서 우선 놀라고, 그런 다음 눈꼽만큼 변형해서 위대한 발견이라고 소리치지 않았느냐? 그렇게 규칙적이고 조직화된 세계를 만드신 분 앞에 겸허하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저 넓은 바닷가에서 예쁜 조개껍질 하나를 주워서 기뻐하는 아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뉴턴이었다.

23.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려고 마음을 먹었으면(18) 바로 여자를 만드는 이야기로 넘어가야지 중간에 짐승들의 이름을 붙인 기사(19)가 왜 들어갔을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단순한 작명의 차원이 아니라 그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모든 피조물의 본질을 다 이해하고 파악해도 진정으로 자신의 돕는 배필은 없더라는 뜻이다: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가 있어도 진정한 자신의 배필은 한 사람밖에 없다. 부인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를 따라서 살자.

24. 남자의 갈비뼈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으니 남자는 갈비뼈가 하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갈비뼈가 하나 부족한 것은 아니다. 어느 구절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런 잘못이 생겼을까?

    살로 대신 채우시고: 갈비뼈 개수가 몇 개냐는 둥 이런 데 너무 신경 쓰는 것도 잘 하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쓸데없는 관심이 참 많다. 더구나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아담의 갈비뼈를 빼냈다 해도 후손들에게는 여전히 그대로 있어야 한다. 사고로 갈비뼈를 잃어버려도 자식에게는 여전히 그대로 있잖아!

    왜 갈비뼈로 만들었을까? 남자는 흙으로 만들었고 여자는 갈비뼈로 만들었으니 재료상으로 보면 여자가 월등히 우수하다? 비싼 물건을 깨어지기 쉽다? 머리나 다리나 살 많은 궁둥이는 놔두고 왜 갈비뼈로? 머리를 떼어서 만들면 너무 교만하고 다리에서 떼어 만들면 너무 천대받을 것이고 그래서 중간의 갈비뼈로 만들었다? 그딴 데 신경 그만 쓰고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어 서로 돕고 살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해도 안 되고, 여자가 남자를 짓밟아도 안 된다.v

25. 생물학적으로 보면 남자를 재료로 해서 여자를 만들 수는 있어도 여자를 재료로 해서 남자를 만들 수는 없다고 한다. 그것은 남자의 염색체는 (   ) 두 종류로 되어 있으나 여자의 염색체는 (   )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XY, XX : 성경이 과학적이니 아니니 떠들어대니 이런 소리도 해보는 것

26. 하나님께서 아담의 몸(冂)에 손을 넣어(入) 갈빗대(人)를 빼낸 글자는?

    肉: 한자를 배울 때는 고기의 결을 본 따서 만들었다고 배웠는데 글쎄?

27. 하나님께서 하와를 데리고 왔을 때 아담이 어떻게 그 여자의 살과 뼈가 자신의 살과 뼈임을 당장에 알아차렸을까?

    그만한 지혜는 있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우리가 없을 뿐이지(22번 참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말을 다른 표현으로 고치면 ‘오, 마이 엑기스’가 아닐까? 우리말에는 없지만 원어에는 now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다. 맨날 동물들과만 지내다가 ‘이번에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을 발견한 셈이다.

28. 영국의 어느 유명한 사전에 나오는 이야기란다. 아담이 처음에 하와를 보고 소리친 말 “Wo! man(우와! 사람이다)"에서 woman이란 단어가 생겼단다. 성경적인가?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인가?

    아담과 하와가 영어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없다: 사실은 남자를 ‘이쉬(ish)’라고 하는 데 여자는 거기에 여성형 어미 ‘아’ 발음만 덧붙여서 ‘이샤 (isha)’가 된다.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는 게 바로 이런 까닭이다.

29. 성경이 말하는 결혼의 중요한 원리 두 가지를 본문에서 찾아보자.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과 부모를 떠나는 것: 부모를 떠나는 것이란 의미는 배우자를 제일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라는 말이다. 부부가 함께 부모를 섬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합의하지 않고 서로가 몰래 각자 자기 부모를 섬기는 것은 부모를 떠나지도 않은 것이며 동시에 둘이 한 몸을 이룬 것도 아니다.

30. 결혼이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근거를 본문에서 찾는다면 무엇인가?

    천지창조의 한 부분,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최초의 제도: 결혼은 단순한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던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제도다. 개인이 마음대로 하고 말고 하기에는 하나님께서 너무 큰 관심을 가지신 일이다.

31. 삼위일체라는 말과 표현방법상으로 가장 비슷한 표현을 찾는다면?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삼위일체를 무리없이 잘 설명하면 이단이란다. 그만큼 사람의 지혜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은 삼위이면서 동시에 한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영원한 수수께끼일지도 모른다. 다만 둘이서 하나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부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얼마정도는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말씀대로 사는 사람만이 실감하도록 교묘하게 장치해둔 것이 결혼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인지 잘 보여준다.

32. 2장의 ‘(그)사람’이라는 단어는 원어상으로 ‘(하)아담’이다. ‘그 사람’을 전부 ‘아담’이라고 바꾸어서 읽어보자. 반대로 ‘아담’을 ‘그 사람’이라고 읽어보자. 그렇게 읽어도 별 무리가 없는 것이 몇 개나 있는가?

    그 사람은 3개(15, 16, 18), 아담은 7개 전부: 의도적인 애매성이 보인다. 아담이 곧 사람이다. 그가 사람의 대표성을 띠고 있음을 밝히려는 의도로 이렇게 애매하게 기록한 것은 뛰어난 문학가의 소질을 갖고 계신 분의 작품이다. 개역 성경과 NKJV은 2:19절부터 아담으로 번역하였지만 NIV는 3:17절을 처음으로 아담이라고 했고, 표준새번역은 3:20에 가서야 아담이라고 번역했다. NASB는 3:21에 가서야 아담이라고 했는데 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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