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9장 | |||||||||||||||||||||||||||||||||||||||
섬기는 예법(제사제도)과 세상에 속한(지상의) 성소에 대한 규례: 모세 이전에 다른 언약도 있는데? 노아도 있고 아브라함도 있는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본다면 모세와 세운 언약이 제대로 된 첫 언약이라고 볼 수 있다. 2. 1절의 성소와 2절의 성소는 어떻게 다를까? 1절의 성소는 성막 전체를 가리키고 2절의 성소는 성막의 두 방 중에서 앞 쪽의 큰 방(=첫 번 째 장막)을 가리킨다. 3. 성소의 모습을 설명대로 정리해보자(2-7). 물론 히브리 기자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성소가 아니다(5). 성소는 무대배경인 셈이다.
1) 몇 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가? 4. 본문에 나타나는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역할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제사장은 성소에, 항상 들어가지만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일년에 한 차례 들어감: 반복해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이들의 역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증거인 셈이다. 5. 제사에 왜 꼭 피가 필요한가? 물건을 정하게 하려면 차라리 소금이 낫지 않을까? 왜 소금은 쓰지 않았을까?(7, 11-22) 원칙적으로 피없이는 안된다(7, 22). 피흘림이 없는 제사(곡식을 드리는 경우나 전제 등)도 있었지만 그런 제사도 반드시 번제와 함께 드려지기 때문에 여전히 피흘림이 수반되는 제사다.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소금을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6. 대제사장이 매년 일차씩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7)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난 것인가 아닌가?
지성소 앞에 성소가 있다는 자체가 일반 대중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지성소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셈이다.
아쉬운 대로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차례라도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을까? 지금 우리가 볼 때에는 전혀 아닐 수도 있지만... 7. 장막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먹고 마시는 것과 씻는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무슨 관계가 있거나 공통점이 있다는 말인데? 이것들은 동일하게 비유이며 일시적인 육체의 예법이긴 하지만 속죄의 방법이기도 하며 온전한 것이 올 때 개혁의 대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옛 언약에 근거한 속죄가 일시적이요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다(8)는 것은 의식적이고 외형적인 속죄는 가능하지만 인격 대 인격으로까지 회복시키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8. 새로운 성소가 이전의 것과 다른 점은?
9. 두 장막의 가장 큰 공통점은 무엇인가? 피가(제물이) 필요하다. 10. 11절의 ‘장래’는 번역에 따라 ‘이미 이루어진’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더 문맥에 맞을지 생각해보자. 이미 이루어진 일을 가리킨다. 내용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11. 11절과 12절은 많은 내용을 한 문장에 담았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핵심은 무얼까?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탁월성을 설명하는 말이다..나머지는 바로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12. 염소와 황소의 피는 제사 드릴 때 잡은 짐승의 피를 가리킨다. 그러면 동일한 용도로 사용된 암송아지의 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암송아지는 원칙적으로 속죄제에는 사용하지 않고 화목제에만 사용되었다. 특별한 경우에 암송아지를 속죄제로 쓰는 수가 있었는데 이 경우에도 제물을 진 밖에서 불사르고 불사른 재를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민 19). 암송아지의 피는 속죄용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화목제로 쓸 때는 내장만 사르고 고기는 나누어 먹었다(레 4). 화목제가 번제와 다른 점은 암컷도 쓰인 것인데 모두가 구별됨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13. 제사에 암송아지도 사용했을까? (참고: 레4, 민19) 원칙적으로 염소와 황소의 피만 속죄용으로 사용했고 고기는 전부 불살랐다. 암송아지를 속죄제로 쓰는 경우에는 불사른 재를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민 19). 암송아지의 피는 속죄용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화목제로 쓸 때는 내장만 사르고 고기는 나누어 먹었다(레 4). 화목제가 번제와 다른 점은 암컷도 쓰인 것인데 모두가 구별됨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14. 번제로 드려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과 염소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를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더 무게가 있을까? 설명해보자. 그림자와 실체의 차이, 피조물과 창조주의 차이, 남의 집 염소 떼와 자기 집 외아들과의 차이, 금과 보관 증서의 차이: 전자는 육체를 정결케 하는 것이고 후자는 양심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요는 그리스도의 피의 효능이 탁월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15. 삼위 하나님께서 동시에 나타나는 장면이 흔치 않다. 본문의 어디에 있는가? 14절: 인류를 만드실 때도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도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일이다. (참고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이런 장면이 있음) 16.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란 ‘첫 언약 아래서 속죄받지 못하던 죄(일시적인 속죄는 가능했지만 근본적으로 속죄받지는 못했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첫 언약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말인데? 새 언약에 비추어보면 그렇다. 첫 언약이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이 얼마나 탁월한 것인가를 설명하려다보니 새 언약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새 언약이 주어지기 전에야 유일한 속죄의 길이니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 예전에는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절대로 남에게 빌려줄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자동차가 보편화되고 나니 오토바이가 별 시세가 없어진 것과 비슷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탁월한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새 언약의 중보가 되었다. 중보가 뭐야? 보증인? 17. 제사에 꼭 피가 필요한 이유를 말하면서 유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언이 효력을 발하기 위해서는 유언하는 자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속죄에도 반드시 죽음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선언에서 비롯된 것이다(유월절, 제사, 각종 정결례). 우리나라 제사처럼 조상이 와서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18. 15-22에 들어 있는 ‘언약’과 ‘유언’은 같은 단어(diatheke)이다. 같은 단어를 왜 16-17만 ‘유언’이라고 다르게 번역했을까? 언약이 피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하면서 유언대신 언약으로 바꾸어서 읽어보자. 언약은 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언약을 어기면 죽어야 한다(창 2:, 15: ). 일단 언약이 깨어졌으니 당사자는 죽어야 한다. 일단은 죽어야 다시 언약을 맺든지 말든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중보자가 되셔서 대신 죽었다는 뜻이다. 굳이 동일한 단어를 두고 유언이라고 번역할 이유(위의 질문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이유)가 없을 것 같다. 19. 첫 언약에서 피가 무슨 역할을 하는가(18-22)? 정결케함: 물건에 피를 뿌린 것은 정결케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뿌리면(19절의 온 백성)? 정결이 곧 죄사함을 뜻한다. 첫 언약에서도 반드시 피가 필요했다. 기자는 계속해서 ‘죽음을 통해서 언약이 회복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20. 피를 뿌려 정하게 해야 하는 장막과 그릇들(21)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다(23). 그렇다면 이 장막과 그릇에 뿌리는 짐승의 피도 모형이다. 무엇의 모형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하늘에 있는 그것들(23)’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늘에 있는 것도 정결케 되어야 하나?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모형에 대비되는 원형이란 뜻이다. 장막과 그릇을 정결케 하는 것은 백성들을 속죄케 하기 위함이라면(모형의 의미), 하늘에 있는 것들에 뿌리는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의 백성들을 거룩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원형의 의미). 21. 하늘로 가신 예수는 더 좋은 제사장의 임무를 다하셨다. 모세의 장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제사장과 비교하면 어떤 점이 더 나은지 두 가지를 찾아보자(24, 25절에서 각 1개씩).
24절: 하나님 앞에 친히 나타나심 ↔ 대제사장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간접으로 만났음 22. 예수님께서 세상 끝에 나타나시리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분명히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때가 왜 세상 끝인가? 고난을 받고 자신을 제물로 드린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예수의 죽음은 모든 것을 다 이룬 종말적인 사건이다. 그 이후의 2천년의 역사는 우리 눈에 길게 보일 뿐, 하나님의 눈에는 외아들의 희생에 대한 뒤처리(마무리) 시간일 뿐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예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다 포함하는 말이다. 23. 여기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27)는 말씀을 하는 이유는 무얼까?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예수의 피에 자신을 씻으라: 위대한 제사장 예수를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아닌가? 예수를 믿으라!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 아닌가! 24.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인데 우리를 위하여 예수가 죽으셨다면 우리는 이 죽음을 면해야 하지 않는가? 영원한 죽음이 문제이지 육신의 죽음은 죽음도 아니다: 예수는 우리의 육신을 죽음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희생하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새로운 몸도 포함됨)을 위해서 죽으셨다. 진짜 죽음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예수는 다시 나타나시리라. 25.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매년 제사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죄가 용서됨을 확인하고 반성했을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번의 죽음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그 분의 죽음을 우리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니니(영화 Passion Of Christ 때문에 체험?) 죄의 심각성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예배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분의 사랑을 되새겨야 한다. 26.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은 진정으로 완벽한가? 내가 추가로 다른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무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느냐의 문제이다(성화). 구원의 문제와 분명하게 구별하면서 노력해야 한다. 27. 대제사장과 예수는?
28. 다음 세 부분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제목을 붙이고 어떤 관계인지 살펴보자. 1) 8:7-13: 새언약에 관한 것(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