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4장 |
싸움, 다툼, 정욕, 욕심, 살인, 시기, 간음, 세상의 벗, 하나님의 원수, 교만, 죄인들, 더러운 손, 두 마음을 품은 자, 비방, 판단, 허탄한 자랑, 등이 이들의 특징이다. 야고보는 이들이 고백과 삶이 일치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데 이들의 현실은 칭찬보다는 야단맞기에 딱 알맞다. 믿기는 하지만 행동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니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책망하는 것이다(2:24). 2. 어떻게 교회 안에서 싸움(지속적인)이 있을 수 있으며 다툼(개별적인)이 일어났는가? 욕심 때문에(1): 정욕이란 쾌락에 대한 욕망, 즉 욕심이다. 이것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의 욕망(자기 주장)이 앞서 있으니 싸우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다투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만(7)이 해결책이다. 3. 교회 안에서 싸우는 것이 왜 어리석은 일인가(1)? 지체끼리 싸우는 일이기 때문에: 지체란 자기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인데 비유컨대 형제들도 지체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는 일은 제 살 뜯어먹기다. 4. 다음 구절(2절)에 쉼표를 찍는다면 어디가 좋을까? <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 ‘살인하며’ 앞과 ‘못하나니’ 뒤: 만약 ‘살인하며’ 뒤쪽에 한번 쉼표를 찍으면 실제로 살인을 행한다는 뜻이다(살인하고, 싸운다는 뜻). 아무리 싸움이 있고 다툼이 있다고 해도 교회 안에서 그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답처럼 앞쪽에 찍으면 실제적인 살인이라기보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시기함을 강조하는 표현이 된다(얻지 못하고 싸운다는 뜻). 5. 성도들이 하나님께 얻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2, 3절)? 기도하지 않고 욕심내고, 시기하기 때문이며(2), 기도하더라도 잘못 구하였기 때문이다(3 ↔ 시 34:15, 145:18, 잠 15:29, 눅 18:14, 요 5:14)): 믿는다는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고 싸움이나 하고 있으니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책망하지(2:24). 6. 간음에 대해서는 주로 남자들을 책망하던데(마 5:28)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여자들이 이런 일에 앞장섰을까(4)? 문자적인 간음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다른 번역본들은 대체로 ‘간음하는 자들이여’라고 번역하고 있다. 세상과 벗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7. 5절의 ‘사모한다’의 주어는 무엇, 혹은 누구일까? 성령이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성령을?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 결과적으로 성령이 시기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시기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이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라는 것만 알면(출 20:5, 34:14, 신 4:24, 5:9, 6:15, 32:21, 수 24:19) 문법적인 구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굳이 문장의 구조를 따지자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the spirit he caused to live in us, NIV)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혹은 성령께서) 이렇게 사모하는데 너희가 어떻게 세상과 벗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8. 세상을 벗하고 사는 것이 바로 간음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기(질투)하신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하나님께 순복하라(7),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8): 야고보의 독자들은 확실히 문제가 많았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야고보의 입자에서는 이들을 야단 칠 수밖에 없다.
믿기는 하지만 행동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니까 ‘믿음만으로 아니니라’고 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그 아름다웠던 모습은 어디 가고?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고 한다. 웃으며 즐겁게 사는 사람에게 왜 이러는가? 하나님 없는, 세속적인 웃음과 즐거움은 영양가가 없기 때문이다. 계속 그러다가는 영원한 죽음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돌아서라는 것이다. 10. 독자들에 대한 호칭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너희(1), 간음하는 여자들(4), 죄인들(8), 형제들(11): 야단칠 때는 치더라도 변함없는 형제이다. 11.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어떻게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되는가? 계명의 핵심이 하나님 사람, 이웃 사랑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했지, 비방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 혹은 잘못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결국은 그 법이 잘못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율법을 주신 이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일이다. 12.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판단치 말라)? 율법에 어긋나게 사는 사람은 그렇다고 지적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판단치 말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자. 재판하는 자의 심정이 아니라 간청하는 자의 심정으로 그리하면 될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말하지도 말자.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말자.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롬 14:4)? 13. 내일 일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일년 계획을 세우다니(13)? 그러면 10년이나 20년 후의 일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저축, 보험, 노후 설계를 다 집어치우라는 말인가?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고 말하라는 것이다(15).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제대로 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행하는 일이야말로 아침 안개이다. (신 8:17-19)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4. 야고보 사도가 이들을 향해서 굳이 행함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17)? 이미 무엇이 선인줄 알기 때문이다(17): 차라리 모른다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런데 믿으면서, 무엇이 선한 일 인줄 알면서 행치 않기 때문에 이렇게 책망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