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 장


1.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 것은 자꾸 찾아와서 번거롭게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 과부처럼 밤낮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까?

    귀찮아서? 주기 싫은 데 하도 고집이 세니?;
    말도 안된다. 사도 바울에게 은혜가 족하니 그 문제로 더 이상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 역시 기도의 응답이다. 비록 재판관은 귀찮아서 들어주었을 지 몰라도 하나님은 귀찮아서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오직 자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 비록 원한에 사무치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최선의 응답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한다.

2. 들어줄 수 없는 기도를 자꾸 조른다고 들어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 아버지는 한번 안된다면 안돼요' 라는 말이 있는 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안될 것을 되게 해 주신다? 자꾸 조르면?

    우리가 아무리 졸라도 안되는 일은 안되는 법이다. 다만 어떤 방식이었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응답하실 것이 확실함으로 비록 고난과 핍박이 오더라도 꾸준하게,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3. '항상 기도하라'는 말과 비슷한 표현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다.
그러면 언제 쉬고, 언제 밥먹고, 직장은 언제 가지?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하는 삶이어야한다;
    즉 밥 먹고, 직장 생활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기도의 삶이어야 한다.

4. 비유로 설명한다는 것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에게 어떤 점이 같은가?

    원한을 풀어주는 것;
    불의한 재판관도 소원을 들어준다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는 뜻이다. 단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말도 안되는 것을 가지고 떼를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점이다. 말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들어준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5. 비유는 항상 일부만 진리이다.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한 단어를 찾아보자.

    하물며;
    하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처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재판관도 이러한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시겠느냐?

6.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은 이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어떤 사람이 없을 것이란 말인가? 세계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데......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는 사람;
    우리가 보기에는 도저히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정하신 최선의 때에 최선의 방법으로 들어주시는 것을 낙심하지 않고 믿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논리적으로 주장할 때 제대로 대답도 못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고고학의 발달이라는 통쾌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셨다. (고등비평에 대한 고고학의 발달)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다시 나오게될 것이라는 약속도 어쩌면 모두가 다 잊어버렸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불러내어 새로운 민족으로 이끌어 가셨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7. 바리새인이 말하는 것, 즉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고 세리와 같지않다는 말은 사실일까? 거짓일까?

    틀림없이 사실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은 거의 맞는 것 같다. 문제는 그것을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남을 멸시하는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이 잘못이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 것까지 잘못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의롭게 여긴 것도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다소 잘못이 있지만 더욱 큰 문제는 자신만 의롭게 살면 좋을 텐데 자기처럼 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정죄한 것이다. 선하게 살려는 사람이 옆의 사람을 돌아보면 이런 현상이 잘 나타나므로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한다. 다른 사람의 악함에 신경쓰지 아니하고.......

8. '또 한 주간을 세상 속에서 죄만 짓다가 오늘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가끔 나오는 대목이다.
정말 하나님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한 주간을 지낼 수 있단 말인가? 온통 죄만 지으며 살았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믿고 열심히 살았다는 고백을 하면 안되나?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부족함이 많았다면 또 몰라도...... 우리의 기도가 어떤 유형인지 살펴보자.
우리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닮았는가 아니면 세리의 기도를 닮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기도인가?

    바리새인의 기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랑하고 싶은 게 있다.
    세리의 기도;
    자신이 늘 죄인처럼 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보다는 낫다.
    우리의 기도;
    바리새인처럼 열심히 살자.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아님을 알아서 겸손하게 엎드리자.
    감사의 기도;
    기도의 최고봉은 감사와 찬양이다. 하나님께 요구할 것도 없고, 오직 감사함으로 찬양만이 넘치는 것이 최고의 기도이다.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자는 질문이다. 정답이 따로 없음; 세리가 칭찬을 받았다고 세리처럼 살라는 뜻이 아니라 마음 자세가 그래야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한 것은 바리새인에게 배워야할 점이다. 마음 자세는 세리에게 배우고, 바르게 살려는 노력은 바리새인에게 배워야 한다)

9. 어린이 라는 말은 방정환 선생님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만들어 진지 150년 정도된 말이다.
'∼하는 이' 라는 말 속에는 하나의 인격으로 대우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예수님 당시에도 여자나 어린아이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예수님의 이 답변은
얼마나 파격적인 것인지 모른다. 방 선생님보다 2000년 정도 일찍 이런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방선생님도 어린 아이를 어른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지않고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자는
주장을 함으로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어떤 존재라고 말씀하시는가?

    천국의 주인;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지닌 자

10. 17절은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다음 중 어느 것이 옳으며 그렇다면 우리에게 요구하는 덕목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 돌보듯이 받들어야한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함께 받들어야 한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가 받드는 것 같이 받들어야 한다.
    3번; 말씀을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진무구함(=단순한 믿음)

11. 예수님께 찾아온 이 관원은 실제로 율법을 다 지키면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음이 틀림없다.
그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의 첫 답변을 듣고는 매우 기뻤을 것이다.
자신이 듣고 싶은 바로 그 대답이었을 터이니까. 그러나 뒤이은 다음 대답이 그를 실망시키고 말았다.
그가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재산이 많기 때문이다(1점),
    영생을 얻기위해서 노력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늘의 보화에 그렇게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이 땅에서의 재산이 하늘의 보화보다 더 중요하였다(2점); 마치 양다리 걸치듯이

    처음부터 질문이 잘못됐다(3점);
    영생은 '내가 무엇을 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차라리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누가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은 대답은 사람은 할 수 없다 는 것이었다. 반면에 이 관원은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실망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12. 이 부자 관원이 실망하고 돌아서는 것을 보고 제자들도 걱정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에 베드로는 쾌재를 불렀다. 왜?

    자신들의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좇았으니 하나님 나라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22절의 '하늘에서 보화' 를 생각하고 있을 지도.

13. 예수님의 말씀도 문자 그대로 받아야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 의미를 찬찬히 새겨야할 때가 더욱 많다.
가령, 29-30을 문자적으로 잘못 이해하면 우리는 가정을 다 버려야한다.
부모도 버려야한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어떻게 하나? 아내도 버리면 금세에 여러 배를 받는다고?
한 번 버려봐? 재산도 많아봐야 다 나누어 주어야하는 것(22)이라면 굳이 많이 벌려고 애쓸 필요도 없잖아?
그러면 어떡하란 말인가?

    가족을 버리면 안된다. 재산도 함부로 허비하면 안되고 많이 벌기 위해서 노력해야한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둔 사람들에게 있다. 생의 최종 목표가 이런 것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버려야한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다. 단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선하게 사용하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도 따지고 보면 영적인 복이지 육신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도 집도 가족도 없이 사신 분이며, 이 땅에서의 영화를 바란 분이 아니지 않은가? 제자들 중에 이런 복을 받아누리며 이 땅에서 호화롭게 살다가 간 사람이 있는가? 물론 그렇게 사는 것보다 더 큰 행복과 평안을 누린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누림의 질에 관한 문제이지 양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위장이 탈이 나서 제대로 먹지못한다면 진수성찬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14.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수님에 관한 글(31);
    구약의 기록은 여러 가지 상황과 관련된 수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실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된 것이다. 예수님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 지를 밝히는 것이 구약을 배우는 가장 큰 목적이다.

15.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데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이 감취었기(34) 때문이다.
말해주어도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 이유를 그 앞의 베드로의 말을 근거로 해서 답을 찾아보자.

    28절의 말은 무엇인가 큰 것을 노리고 있는 느낌을 준다;
    세속적 야욕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은 공허할 뿐이다.

16. 3일 만에 다시 살아 날 능력이 있는 분이 무엇 때문에 이방인의 손에 넘기워져서 그런 수난을 겪는가?

    예수님은 능력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해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단지 우리 대신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능력과 상관없이 어떻게든 죽을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셨다. 아담에게 선고되었던 그 죽음의 값을 대신 치르시는 것이다.

17. 여리고에 있던 이 소경은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들의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1점).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다소 얕잡아 보는 표현이기도 한다.
    이 말을 듣고 대뜸 '다윗의 자손 예수' 라고 부른 점이다(2점).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고 있었다. (사11:1)

18. 이 소경들은 정말 아슬아슬하게 눈을 떴다. 막차를 간신히 올라탄 사람의 행복이나 안도감이 느껴진다. 왜?

    바로 며칠 뒤에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이므로;
    이 때 기회를 잘 잡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소경으로 지냈을 텐데.

19.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미 주시기로 작정한 것이라도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시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간절하게 기도해서 주어진 것(개인적으로 기도하여 응답받은 것)과 저절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우리에게 저절로 주어져 있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 지 비교해보면 자명해진다.
이런 뻔한 질문을 본문에서 찾는다면?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
    너무나 뻔한 질문을 하시는 이유는 그런 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자지간에도 필요한 학비, 하숙비...... '알아서 주시겠지' 하고 그냥 있는 것보다는 적당한 때에 적당하게 말씀도 드리고 감사도 표하는 것이 부자관계를 더 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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