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1


1. 부부는 이렇게 싸운다. ‘내가 안 해준 게 뭐고?’ ‘해준 건 뭔데?’ 누가 틀린 말을 하고 있을까? 누가 틀렸다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온갖 사랑을 다 베푸셨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서 ‘언제 어떻게 사랑하셨는데요?’ 한다. 하나님은 속이 확 뒤집힐 판이지만 참고 대답하신다. 간단하게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야곱(이스라엘)을 선택하지 않았느냐?(=지난 역사를 되돌아 보라): 성전을 재건하고 수십년이 흘렀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사 49:8-26, 학 2:6-9) 기대했건만 고달프기만 하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형식적으로만 섬기고 있었다. 누구 탓이지? 사랑이 적은 하나님 탓인가? 눈 앞의 힘든 상황만 보지 말고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야곱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이끌어 오셨는지 좀 길게 보라고 하신다. 눈 앞의 힘든 현실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구원역사를 바라볼 눈이 있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좀 화끈하게 은혜를 베푸시면 안될까? 나라를 회복시키시고 왕을 세우고 먹을 것이 풍성하도록 해주시면 안될까? 그러면 잘 섬길텐데!

    아마 그래도 마찬가지일 것: 모세, 여호수아 시대를 회상해보면 그래도 안되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항상 현실에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에라도 만족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이상 뭔가를 채워줘서 행복할 수는 없다. 이들이 이런 형식주의에 빠진 것이 하박국의 처지보다 못해서 그랬을까? 구원으로 인한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외양간의 소를 채운다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아니다. 아니, 하나님은 그런 식의 물량공세로 사랑받고 싶은 분이 아니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면 하나님을 잊어버릴텐데... 이것이 하나님의 고민이었다(신 8:11-14, 삿 7:2).

3. 하나님께서 에서를 왜 미워하셨지?

    야곱을 선택했을 뿐이다: 둘 다 택하시지 않고? 나아가 모든 인생을 다 택하시지 않고?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지 모른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스스로 허무는 일이다. 도저히 그냥 용서는 안 된다. 그런 와중에서 야곱을 선택한 것도 엄청난 양보일 수 있다. 에서는 그냥 두었을 뿐이다(=유기). 그 결과가 멸망으로 나타난 것이다. 에돔처럼 멸망하는 것은 본전이다. 야곱처럼 선택된 것은 엄청난 특혜다. 이런 특혜를 받은 사람이 ‘왜 에서는 버리셨느냐?’고 불만을 토로한다. 하나님도 자존심(?)이 엄청 강한 분이시다.

4. 에돔의 죄가 무엇인가?

    교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대항하는 것이 교만이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버리셨으니 에돔인들 반항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이 말씀은 에돔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에돔이 뭘 잘못했느냐고 굳이 따지면 ‘야곱이 선택되었음을 알지 못하듯 에서는 버림받았음을 알지 못했다. 에돔 족속은 자기들 욕심이나 생각에 따라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악했다. 하나님께서 버리셨기 때문에 에돔이 악해진 것이 아니다.’

5.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는 것이 왜 그리 큰 감격인가?

    고대의 신들은 일정한 영역이 있었다. 일종의 지역신이며 특정 분야의 신이다. 그 지역을 벗어났는데도 하나님께서 거기 계심을 발견하고 놀라곤 했다(야곱, 요나). 그런 점에서 보면 온 세상(이스라엘 지경 밖)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6.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본업인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다니? 그렇게 책망했더니 제사장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가 어떻게?(6, 7): 본인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단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주의 상은 경홀히 여길 것이라’는 것이다(7b). ‘총독은 눈에 보이고 기분 나쁘게 하면 당장 영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도 모르겠고, 당장에 무슨 날벼락이 나는 것도 아닌데 아무러면 어때?’ 하는 식이다.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 고급스러운 통치에 저급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일을 했지만 마음은 전혀 드리지 않았다. 2:9까지 제사장의 타락(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이다.

7. 인생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레 25:17, 신 10:12). 어떻게 하는 것이 경외(공경할 敬, 두려워할 畏)인가?

    아버지처럼 공경하고 주인처럼 두려워함으로(6):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기뻐해야 한다(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 1번). 연인처럼, 아니, 요즈음 아이들이 아버지를 친구처럼 여기듯이!

8. 일종의 대질신문이다(7-8). 하나님은 멸시를 당했다고 하고 제사장들은 그런 적이 없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시한 구체적인 사례가 무엇인가?

    더러운 떡(7, 레헴 = 레 3:11, 16의 ‘식물’), 눈먼 희생(저는 것, 병든 것도, 8): 총독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께는 눈 먼 것을 드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겁을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할 것이다! ‘가납하겠느냐, 받겠느냐’ 이 말은 직역하면 ‘너의 얼굴을 들어주시겠느냐?’ 이다.

    추가로,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속으로 그랬잖아(12)?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따져야 하다니...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함부로 그런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정말로 일방적인 경우도 있다.

9. ‘제발 성전 문을 닫으라!’ 고 한다면 ‘너희들과 관계는 끊고 다른 자식을 보겠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부자지간의 관계를 끊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라는 말씀에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아픔이 묻어난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마음대로 하시지 못하는 것이 자식인가 보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마음이, 훗날, 먼저 복음을 받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니 일단은 복음이 이방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10.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10) 이 표현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바꾼다면?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요 4:21)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 장소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슨 제물을 드리느냐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찬미의 제사(히 13:15), 선을 행하는 제사(히 13:16, 미 6:8, 빌 4:18)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11.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다보니 말을 함부로 한다. 제사장들이 해서는 안될 말이 무엇인가?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번폐(번거로운 폐단)스럽다는 말은 귀찮다는 말이다. 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안다면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 텐데... ‘곁에 두고 심부름이나 하게 해 주셔요’ 조그마한 권력을 지닌 사람 옆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것도 얼마나 큰 영광이라고? 하물며 백성들을 대신해서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데?

12. 12절과 13절이 어느 구절의 반복인가?

    12절은 7절의 반복이고, 13절은 8절의 반복이다.

13. ‘이왕에 더러워진 건데, 먹지도 않을 건데 아무렴 어때?’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제사장들이 하나님께(12).

14.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제물이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예가 있는가?

    눈먼 것(8), 저는 것, 병든 것(8, 12), 토색한 것(13): 이런 것들은 전부 흠 있는 것(14)이다. 바칠 것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14). 하나님이 큰 임금이심을 모르는 탓이다. 그래서 그 분을 상대로 사기치는 것이다. 정말 죽을라고 용을 쓴다!

15.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여기에 어떤 단어를 추가시키면 이해하기 좋을까?

    수컷 앞에 ‘좋은(흠없는)’

16.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고 자랑하실 필요가 있을까?

    자랑이 아니다. ‘너 한 번 죽어볼래’ 라는 뜻이다.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보다 어떤 상황에서 하는 말이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야단치면서 하는 이 말은 무서운 경고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가 바로 5파운드야’ 하시던 학생주임 선생님이 계셨다. 그 앞에 불려오면 거짓말이나 변명할 생각도 않는다. 5파운드는 야구 방망이의 무게를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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