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4 |
풀무불의 초개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사람도 용광로에 떨어지면 문자 그대로 흔적도 없다. 하물며 초개야! 반면에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는 힘이 넘친다. 고삐 풀린 망아지나 다름없다. 칠랑팔랑 뛰어다니며 외칠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3차 세계대전이 오든, 유성이 충돌을 하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성도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런 종말 속에서도 송아지처럼 뛰놀면 된다. 2. 종말의 풀무불이 얼마나 극렬한지 산불과 비교해보면 어떻게 다른가? 산불이 나도 뿌리까지 타는 법은 없다. 온 산을 시뻘겋게 뒤덮은 산불이라도 뿌리와 굵은 가지는 남는 법이다. 심지어 흙 속에는 새생명의 씨앗이 남아있다. 그런데 종말의 불은 뿌리까지 다 태운다. 악은 완벽하게 소멸될 것이다. 3.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한다’는 것은 멋진 표현이지만 의역이다. 직역을 하면 의로운 해가 떠올라 ‘그 날개 아래서 치료를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날개는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상징하는 말이다(출 19:4, 신 32:11, 룻 2:12, 3:9의 ‘옷자락’, 시 91:4). 태양이 떠올라 온 세상을 비추듯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백성에게 임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기운이 펄펄 넘친다. 그러면 현재 이스라엘은 어떤 모습인데? 환자처럼 드러누워 있는 존재: 온갖 죄악으로 물들어 있는 상태에서 아무리 날고 뛰어봐야 힘없는 환자일 뿐이다. 저주 아래에서 다 죽어가는 인생이다. 4. 악인을 꼭 밟아야 하나(3)? 의롭게 살려는 성도를 위로하는 말씀: 선지자가 이렇게까지 책망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얼마나 많은 악이 저질러지고 있었을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살려고 하면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 그들을 위로하려는 말씀이다. 멸시와 조롱을 받았겠지만 종말의 날에는 역전될 것이라는 위로다. 5. 선지자는 말을 마치면서 마지막 당부를 한다. 설교를 마칠 때 흔히 쓰는 ‘이제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라는 말을 어디에 넣으면 좋을까? 3절 다음, 4절 앞에: 대 여섯 편의 연결된 짧은 설교를 간단하게 두 가지로 요약하는 셈이다. 6. 왜 갑자기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고 하시지? 복습(요약)인 셈: 선지자가 말을 마치면서 핵심을 정리하는 셈이다. 제사장에 대한 책망(1:6-2:9)과 백성들에 대한 책망(2:10-3:15)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 모든 법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7. 엘리야는 왜 보내시는가? 차라리 메시야를 보내시지? 복습의 두 번째 핵심인 셈: 이미 메시야와 그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다(3:1). 그것에 대한 정돈이다. 그 분의 길을 예비하는 자를 보내겠다는 것은 메시야를 보내겠다는 것과 동일한 약속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8. 아비와 자식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 오실 엘리야의 중요한 사명이다(6, (눅 1:16)). 아니, 그 일을 위해서 보내는 사자를 왜 엘리야라고 할까? 엘리야가 행한 사역의 어떤 점과 닮았을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려놓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서 여호와 신앙이 말살 단계에 이르렀을 때 다시금 불씨를 살려놓은 것이 엘리야의 사역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는 겨우 100명이 숨어있는데(왕상 18:4) 활동 중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850명이다(왕상 18:19). 9.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면서 엘리야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두 사람(율법과 선지자)이 아니라 메시야이다. 말라기의 이런 메시지가 훗날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지는가? 변화산 상에서 세 분이 함께 모이는 모습으로(마 17:3, 막 9:4, 눅 9:30): 결국은 예수님만 보이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더라고 한다(마 17:8).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다. 진정한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10. 구약성경의 마지막 메시지는 무엇인가? 돌이키지 않으면 칠까 하노라? 선지 엘리야를 보내리라(5): 메시야의 등장을 말하는 신약성경 앞 부분과 잘 이어지는 점이나 중요성을 고려해볼 때 이 약속이 구약의 마지막 메시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