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을 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으니라 하시니라 [개역, 마가복음 9:14~29]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내 입이고, 교회에 나오는 것도 내 발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입니까? 내가 하는 일인데? 교회를 부지런히 다니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는 것 전부 내가 하는 일 아닙니까? 내가 예수 믿기 때문에 하는 일인데 그래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교회 일을 열심히 한다, 봉사도 열심히 한다, 예수 열심히 믿는다 하는데 조용히 앉아서 생각해 보면 내가 과연 믿기는 믿는 것이냐라는 회의가 들 때도 적지 않게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떨 때는 믿음이 아주 많이 있는 것 같다가 또 어떨 때 보면 믿음이 전혀 없는 것 같기도 한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믿음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현상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항상 믿음 가운데서 살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정말 행복한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믿음이 뭐냐고 물으면 좀 분명치 않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본문에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답답한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아버지요?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나온 이 아버지가 아마 가장 답답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장 답답하고 그 다음 아버지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답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버지 다음으로? 예수님요? 예수님도 답답한 것 맞습니다. 도대체 가르친다고 가르쳐 놓았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가르치는 선생님은 제자들을 만났을 때 항상 답답한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답함보다는 좀 더 답답한 사람들이 있어요. 누굴까요? 제자들요? 제자들도 다 같은 제자는 아닙니다. 제자들 중에 세 명은 변화산에 예수님하고 올라갔다가 지금 내려오는 중입니다. 그러면 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명은 산 밑에 있었는데 이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고쳐달라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자들 아홉 명이 고치려고 애를 썼습니다. 나중에 왜 우리는 못했습니까 하는 말로 봐서 이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 기도도 하고 열심히 고함도 질렀을 겁니다. 그런데 안됐단 말이에요. 전에 예수님께서 전도하라고 보냈을 때는 분명히 됐습니다. 귀신도 쫓겨 나가고 병도 나았는데 이번에 해보니까 안되더라는 말이에요. 아이를 데리고 와서는 고쳐달라고 하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아무리 해도 안 고쳐집니다. 나중에 그 일로 예수님께도 책망을 들었지만 자기들도 답답하기는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도 답답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올라갔던 제자 세 명은 이 장면을 보고 “아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거기 있었더라면 “나도 저런 어려움을 당했을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도 했을 것 같습니다. 이 제자들이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예수님께 조용히 묻기를 왜 우리는 이 일을 하지 못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기도를 열심히 해야 될 필요를 느끼곤 합니다. 실제로 기도하면서 병 고치는 분들을 옆에서 지켜 보면 정말 열심으로 기도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제가 많이 본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본 몇몇 분들은 자신들이 죽음에 이르거나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질병에서 그 병을 고쳐달라고 죽도록 기도하면서 능력을 얻은 분들이 많더군요. 그런 능력을 얻었으면 어떡합니까? 평생을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면서 삽니다. 기도해서 얻은 능력으로 기도하면서 병을 고치기도 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평생 기도하면서 삽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능력이 없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실제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기도를 통해서 이런 앉은뱅이들을 고치기도 하고 병을 물리치기도 합니다. 그런 예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 많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 할 때에 나타났었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도 그런 이적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이 처음 증거 되는 어려운 곳에서 열심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증거 할 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런 능력을 더해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가만히 보면 제일 싱거운 사람들이 좀 있어요! 정말 싱거운 사람들입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가는데 제자들이 고칠 수 있는가 가 보자 해서 많은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못 고치더란 말이죠. 좀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 오시는 것을 보고 또, 무리들이 놀라 하면서도 우∼ 하고 뛰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보고 나오라고 명했더니 아이가 거품을 흘리고 구르다가 쓰러진 모양입니다. 구경하는 사람들 겨우 한마디 한 게 뭐였죠? 아[애] 죽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얘기가 없어요. 다른 비슷한 사건이 있었을 때 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찬송을 부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 등장했던 이 무리들은 ‘죽었다’ 한마디 하고 그 다음 다시 살아난 걸 보고 어떻게 했는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주 싱거운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도 우리 주위에서 종종 볼 수가 있지요. 기적을 보아도 믿음의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이런 무리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봅시다. 성도 여러분! 어릴 때부터 이 아이가 귀신이 들렸다고 했는데 지금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귀신들린 자녀를 가진 아버지의 아픔이란 것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아픔일까요? 제 자신도 체험적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기록과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서 어렴풋이 짐작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책을 한 권 가지고 왔습니다. 혹시 보신 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목이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인데 일본에서는 이 사람이 좀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별로 알려지진 않았는데 제 기억이 확실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작년이나 올 초에 한번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양팔이 없습니다. 여기 손처럼 보이십니까? 발바닥입니다. 양팔이 없고 왼쪽 발이 제 기능을 못합니다. 왼쪽 발이 오른쪽 발보다 한 절반 정도나 삼분의 일 정도가 짧아요. 그래서 왼쪽 발에 의족을 붙이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이를 보니까 서른 초반 정도 되어 보입니다. 이 사람이 일본에 많이 알려지고 일본에 매년 와서 연주회를 하는 모양인데 일본에서 선교사가 하지 못하는 그 이상의 놀라운 일을, 복음을 전하는데 선교사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걸 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아이를 가지게 된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는데 자세히 보면 그렇게 슬프지가 않아요. 부모가 어느 정도 아픔을 가졌고 얼마나 고통을 가졌을 건지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사흘이 되도록 의사들이 이 아이를 부모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보여주지 않으면서 이 아이를 부모가 맡아서 키울 수 없다고 했음에도 부모가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이다”는 말을 하면서 이 아이를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얼마나 고생스럽게 키웠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많이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신앙으로 얼마나 밝게 자라났는지 그렇게 슬프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 합니다. 식당에 가면 두 팔이 없으니까 발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합니다. 옆의 식탁에서 어떤 어린 아이가 자기 흉내를 내는 겁니다. 어떻게 흉내를 낼까요? 양팔을 스웨터 안으로 집어넣고 식탁에다가 발을 올리는 거지요. 그 어린 아이가 볼 때에는 아주 재미있는 겁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흉내를 내는,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를 이렇게 키우면서 그 부모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런 아픔을 딛고 기도로 키운 아이가 지금은 결혼해서 누구보다도 더 왕성하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저도 못 들어 봤습니다만 이 분이 음반도 여러 개를 냈답니다. 복음송 가수로서 활동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며칠 전에 국민일보에서 본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부가 결혼하고 14년 동안 아이가 없어서 아이를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14년 만에 아이를 낳고 보니까 아주 장애가 심하더랍니다. 하나님께 당연히 항의 비슷한 기도를 하게 되죠. 하나님! 그렇게 기도하고 애썼는데 모처럼 준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분들이 받은 기도의 응답이 뭐냐면 “나도 이 아이를 14년 동안 누구에게 맡길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너희들이 맡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너희들에게 맡겼다” 하는 음성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기쁨으로 키우기 시작을 했지요. 믿음으로 이런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성도에게는 있지만 실제로 이 아이를 키우면서 당하는 아픔은 말로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자녀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는 가정이 몇 가정 있습니다. 그런 가정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긴 하지만 이럴 때마다 말이 짧은 것이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혼자 생각으로는 이렇게 이렇게 위로해 드렸으면 좋겠다 하다가도 막상 만나면 제대로 말씀도 못 드리고 위로의 말씀도 못 드리는 것이 참 미안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은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권하고 위로하던 일을 참 잘했던 분입니다. 참으로 큰 은사입니다. 혹시 가정에 이런 문제가 있으면 덮어놓고 숨기지 말고 우리 성도들에게 알리는 게 좋습니다. 부모님들의 기도에 온 성도들의 기도가 합쳐진다면 비록 힘들고 어려울런지 몰라도 기도로 키운 자녀는 장애를 지녔다 하더라도 나중에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정상적인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경상도 말로 재바르다라고 하지요. 아이들이 얼마나 재바른지 모릅니다. 재빠르다는 말과 비슷한데 어감이 조금 달라요. 아이들을 키우신 분들은 잘 알지만 어느 때에 아이 보기가 제일 어려워요? 애가 뱃속에 있을 때, 눕거나 업혀서만 지낼 때, 그리고 이 아이가 잘 걸어다닐 때 어느 쪽이 제일 키우기가 힘들죠? 걸어다닐 때요. 아니,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힘들지 않을까요? 남이 보기에는 힘들어 보이겠다 싶어도 그 때가 제일 편하답니다. 태어나서 누워 있고 등에 업혀만 다닐 때는 제 발로 걸어다니기만 해도 다 키웠을 것 같다는 소망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때가 편하답니다. 제 발로 걸어다니기 시작하면 얼마나 신경 쓰이고 힘든지 모릅니다. 요즈음 민찬이 보면 알 수 있죠. 가만 놓아두면 어느새 사라집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애 키우기도 그래요. 하물며 이 아이는 귀신이 툭하면 불에다 집어 던지고 물에다 던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눈만 잠시 떼버리면 불에 뛰어들고 물에 뛰어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의 고생이 얼마만 했겠어요? 이 아이를 고치려고 여러가지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찾아 온 것이지요.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못 고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아들을 빨리 고쳐주셨으면 좋은데 예수님 말씀이 조금 깁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 생각나는 게 있어요. 숨도 잘 못 쉬어서 병원 응급실에 쫓아가면 어떻게든 빨리 조치해서 숨을 좀 쉬게 했으면 좋겠는데 자꾸 물어요.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아니 말도 못하는 사람한테 자꾸 물으면 어떡해요. 언제부터 그랬냐고 자꾸 묻고 환자는 대답도 못하고, 또 피 검사하러 가자, 엑스레이 찍으러 가자, 옆의 사람은 속이 탑니다. 그냥 덜렁 고쳐주면 좋은데 그런데 의사 입장에서는 그렇게 안 되나 봐요. 그러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 담당의사한테 미리 이 환자가 이런 증상으로 병원에 들어오면 이렇게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처방을 하나 받아서 코팅을 해서 가방에 넣고 다니면 편합니다. 그래서 병원 응급실에 가면 아무 소리 않고 그것만 던져 주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걸 가지고 담당 의사한테 전화를 걸더라구요. 그래서 치료절차가 간단히 됐어요. 예수님께서도 좀 쉽게 고쳐주면 될 텐데 얘기도 많이 하고 책망도 하고 묻기도 하고 자꾸 그럽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 아이의 병을 한방에 고쳐버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을 교육시켜야 하고 또 이 아버지가 믿음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아버지의 믿음과 신앙의 상태 그리고 주변에 함께 있는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몇 가지 질문을 하시고 아이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다급해서 이런 저런 대답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이 아버지가 듣기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는 말이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로 들렸을까요 아니면 속이 뜨끔 하는 소리로 들렸을까요? 믿기만 하면 이 아이를 고칠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이 아버지가 속이 뜨끔했겠습니까? 아니면 귀가 번쩍 뜨였습니까? 뜨끔했어요!.. 귀가 번쩍 뜨였어요! 왜 답이 다르죠? 이 아버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믿음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니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귀가 번쩍 뜨이지요.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면 이거 곤란하지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이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을 하였는지 보십시오.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했죠? 그것만 있어도 되는데 한마디 덧붙였어요.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그럼 이 사람 지금 믿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있기는 있습니다. 있습니다 하니까 뭔가 이상해서 나온 대답이 있기는 있습니다. 아니 본인이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하잖아요. 앞뒤가 안 맞아요. 믿나이다 해놓고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이게 믿음 있다는 얘기야 없다는 얘기야? 없다는 얘기입니까? 그럼 못 고치겠네요? 아들을 고치기 위해서 믿습니다 해놓고 자신을 돌아보니까 믿음이 없더랍니다. 그러면 못 고치네요. 설교시간이 아니고 공부시간에 모여서 이런 것을 가지고 토론을 해 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나중에 그런 시간들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설교시간이기 때문에 더 길게 묻고 답할 수가 없습니다. 실상은 이 분이 믿음이 없는 것 같아요. 왜요? 일단은 믿음이 있어야 고친다고 하니까 무조건 있다고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무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 아버지가 자신을 보는 정확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쳐 주셨습니까 안 고쳐 주셨습니까? 고쳐 주셨거든요. 결과로 보면 이분은 믿음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있는 겁니다. 잘 한번 보세요. 본인이 자기 스스로 볼 때는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분의 이런 상태를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고쳐 주시는 것이지요. 이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을 볼 때는 믿음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그 때에 예수님은 믿음이 있다라고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나는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그 때에도 예수님은 믿음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다고 하시는데 우리들 스스로 앉아서 내가 이래 가지고 어떻게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믿음이 뭐냐를 알기를 위해선 아브라함을 예로 드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별명이 믿음의 조상이거든요. 아브라함이 믿어서 의로움을 받았다는 성경 구절이 창세기 15장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하셨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이 구절을 근거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설명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잘 믿었습니까? 만약에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굳게 믿었다면 이스마엘이 탄생할 수 있습니까? 사라의 몸을 통해 자식을 주겠고 그 자식을 통해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고 약속한 것을 굳게 믿었다면 아무리 사라가 원한 일이라 해도 이스마엘을 낳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못한 증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삭의 이름 뜻이 뭐지요? 웃음입니다. 어쩌다가 애 이름이 웃음이 되었나요? 내년 이맘 때에 아들을 낳으리라고 했는데 누가 웃었습니까? 사라가 웃었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왜 웃느냐? 사라가 뜨끔했어요. 안 웃었습니다. 찔리면 시치미부터 떼놓고 보는 게 사람 심리 아닌가 싶어요. 천사가 정녕 웃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하죠.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롭고 유머가 풍부하시며 참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세월이 많이 지나서 엄마가 아들을 부릅니다. 뭐라고 불러요. 이삭아! 할 때마다 뭐가 생각나요? 웃음이 생각나요. 무슨 웃음요?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 때 아들을 주리라 했는데 피식피식 웃었던 웃음이 생각납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말이 안되는 이야기를 해도 사라는 더 이상 웃지 못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한번 웃었다고 애 이름을 그렇게 지어놓으니 애를 볼 때마다 “또 내 말에 웃을래?” 이런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웃지 않았다구요? 웃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은 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그 약속을 완벽하게 믿지 않았다는 증거가 이스마엘을 봐도 알 수 있고 이삭의 이름을 봐도 알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인정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믿음이 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뭐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다른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속에서 이런 것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인정하셨던 이 아비의 믿음에서도 그것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우리들 자신 속에서도 그런 믿음을 발견하기는 좀 어려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을 봐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그러면 믿음이 뭐예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에 증거니’ 익숙한 구절이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믿음이 뭐냐?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믿음 뿐이다는 뜻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볼 수 없는 걸 보여 달라고 할 때 방법은 믿는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내 속에 당신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고 하는데 “좀 보여 주실래요?”라고 하면 뭘로 보여줘요?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도 나쁜 사람입니다마는 보여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웃기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는 표현을 잘 씁니다마는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믿음으로밖에 볼 수 없다라는 설명과 비슷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 뭐냐에 대한 답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 믿음에 관한 글을 읽고 기가 죽었는데 대충 이런 얘기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누가 밧줄을 걸쳐 놓고 그 밧줄 위로 통 하나 짊어지고 건넜습니다. 이 사람이 건너와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여러분, 제가 이 밧줄 위를 걸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어요. “믿습니다” 했겠지요. “그렇습니까? 그러시다면 누구 한 사람 내 위에 올라타세요. 나와 함께 걸어갑시다.” 했더니 아무도 안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믿음이란 이와 같이 나오라고 할 때 나와서 그 통에 올라 타고 함께 이 폭포를 건너가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릴 때 얼마나 기가 죽었는지 아십니까? 난 하나님이 나타나서 “올라타라 건너가자” 해도 난 못 건너가. 그럼 나한테 믿음이라곤 아예 없네요? 그런 비유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기가 많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정말 이런 것이라면 천국가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도 여러분! 이런 믿음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믿음의 최고봉에 해당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아주 완성된 상태인 셈인데 우리가 보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완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많은 훈련을 겪고 난 뒤에는 어디까지 순종하게 되지요?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을 바치는 그 믿음을 믿음의 최고봉이라고 친다면 그런 믿음에 이르기 전, “예 믿습니다” 해 놓고도 이스마엘을 낳고, 또 다른 아들에게 이름을 이삭이라고 붙이는 사건들을 저지르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인정하시더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위대한 신앙만, 위대한 믿음만 원했다면 우리는 아마 다 불합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믿음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무통에 올라 타고 밧줄 위를 건너가는 그런 믿음입니까? 겨자씨 만한 믿음이지요. 겨자씨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아요. 겨자씨를 OHP 필름에 뿌려가지고 스크린에 비추어놓고 “얘들아 저기 뭐가 있냐?” 하면서 찾아보라고 했더니 아무 것도 없대요. 없을 수밖에요. 보일 둥 말 둥 점만 찍어져 있으니까 애들 눈에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태산같이 큰 믿음이 아니라 겨자씨 같은 작은 겁니다. 우리 속에 떨어져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표도 나지 않는 조그마한 그 무엇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이 작은 겨자씨 만한 그 하나를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서 키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차츰차츰 자라나서 새가 깃들고 사람이 쉴 수 있는 커다란 나무로 자라는 것이지요. 우리 속에 뿌려진 그 작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매달려야 되겠다”는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라고 입으로 고백할 때 이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고백,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쩌면 겨자씨 만한 믿음입니다. 이 작은 것이 거대한 믿음으로 자라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서 뭔가 거창한 것을 찾지 마시고 우리 속에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에게만 매어달려야겠다고 하는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를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귀신들린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외줄 타는 사람의 등에 올라타고 가서 함께 그것을 건널만한 그런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은 평생토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본 후에나 가능한 산꼭대기에 해당하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에베레스트 산이 높다고 말할 때 그 산 꼭대기만 에베레스트 산입니까? 산 중턱은 딴 산입니까? 아니 그 산 밑은? 에베레스트 산은 밑도 에베레스트고, 중턱도 에베레스트고, 꼭대기도 에베레스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산에 비유했을 때 산 밑에 있는지, 중턱에 있는지, 아니면 꼭대기에 있는지 각자 다를 것이지만 산 밑에서 이제 올라가려고 한발 들여 놓은 것조차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이 아이를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향하여 믿음이 있느냐 혹은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냐고 물어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때에는 꼭 이 장면을 기억하시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아버지가 엉겁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있습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준에 따르면 없어요. 그러면 이 아이의 아버지가 말하는 ‘있습니다’라는 뜻이 뭡니까? 지금부터 믿겠다는 이야기예요? 애만 고쳐주면 믿겠습니다는 말인가요? 이 아버지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자신의 소망을 나타낸 겁니다. 이 아이를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이를 고쳐 주십시오라는 간구일 뿐입니다. 내게 믿음이 있습니다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아이를 고쳐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망이요, 예수님을 향한 간구를 ‘믿습니다’라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런 다음 자신을 돌아보았더니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더라는 말이에요. 그러나 지금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애절하게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가 대답을 두 가지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말 고맙게도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밖에 안 보셨습니다. 어느 걸 보셨지요? 내가 믿나이다라는 엉터리 고백을 보셨습니다. 이 아이를 반드시 고쳐 주십시오라는 이 마음만 보시고 고쳐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요? 그런 간절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향해서 “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생각이 들면 무엇부터 따지십니까?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 모양이냐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이 자신을 향해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믿음이 있느냐를 보실 때 여러분이 무슨 짓을 했느냐를 따지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부터 보시는데요? 우리 속에 “하나님 외에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먼저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예수님께서 “됐다”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 주신다면 우리가 할 일은 감사밖에 없지요. 자신을 향해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질 필요없이 이런 부족한 나를 받아 주셨음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현명한 부모는 아이들이 뭘 필요로 하는지 미리 압니다. 아이들이 “아빠 이거 사주세요” “저거 사주세요” 하기 전에 현명한 부모는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압니다. 그냥 덜렁 사주면 좋은데 그냥 덜렁 사주기 전에 가끔은 사달라고 조르기를 은근히 기다릴 때도 더러 있죠? 내가 이걸 사주고 싶은데 무슨 좋은 핑계거리가 없나 하고 기다릴 때가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무슨 건덕지가 없나?’ 해서 우리 속을 뒤적이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안타까움인데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 속에 무슨 핑계거리가 없을까 해서 찾아낸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걸 통해서 우리가 요구한 것 이상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내놓을 만한 것이 없더라도 솔직하게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것도 훌륭한 믿음입니다. 그런 보잘 것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위대한 믿음으로 키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 만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고 있으면 차츰차츰 믿음은 자라게 됩니다. 마침내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