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이 맛을 아느냐?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개역, 갈라디아서 2:15~21] 이런 구인광고가 두 가지 붙었다고 칩시다. 하나는, 일 안 해도 한 달에 150만원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150만원이 적습니까? 한 달에 150만원 못 받는 데가 많더라구요. ‘일 안 해도 150만원 보장해 드립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열심히 하면 150만원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을 택하시렵니까? 저는 당연히 2번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대가를 받으려고 해야지 노력하지 않은 것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그런 일도 없으려니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사기 당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사람입니다. 아무 욕심 없이 애쓴 만큼의 대가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사기꾼이 붙어도 잘 안 넘어갑니다. 사람들은 거저 준다는 말을 좋아하는 듯싶지만 사실은 속지 않습니다. “이거 손해 보고 드립니다.” 해도 듣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말로만 그렇지 손해 볼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값을 제대로 지불해야 제대로 된 물건을 구할 수 있습니다. 잘 모르면 값을 제대로 주려고 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한국 사람들은 그걸 역으로 이용해서 ‘값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많이 붙여 놓으니까 잘 팔리더라’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마는 기본적으로 값을 제대로 지불해야 물건이 제대로 된 겁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구원을 받을만한 뭔가를 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로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말입니다.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안 해도 공짜로 주겠다는 말처럼 어딘가 모르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바울이 한평생 외친 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엄청난 월급을 주겠다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좋은 말이 아닌 듯싶은데 왜 바울은 한평생 목숨 걸고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외쳤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열심히 가르쳤는데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 유대주의자들이 찾아와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 겁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겁니다. ‘아무 것도 필요 없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과 ‘너희가 구원을 받으려면 최소한 이런 이런 것들은 해야 구원을 받는다’ 어느 것이 더 솔깃한 말이었을까요? 우리가 이 말씀에 익숙해서 그렇지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구원받을 만한 짓을 해야 구원받는 것 아니냐?’ 이것이 자연스러운 겁니다.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유대주의자들이 한 말에 귀가 솔깃해진 겁니다.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행함이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그러다 보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바울이 사도가 맞긴 맞는 거야?” 이렇게 된 겁니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이상하게 보니까 사도 바울이 사도인 것조차 의심하게 된 겁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왔지만 이게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저절로 믿어지더라구요? 그 말은 여러분들이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유대인들에게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방해하기 위해서 모질게 따라다녔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문제를 안고 있었으므로 갈라디아서를 쓰기 시작하자마자 사도권을 옹호하는 말을 먼저 합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란 말이냐? 그 얘기를 아주 강한 톤으로 언급합니다. 1장 1절 보세요. ‘사람으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이거 얼마나 강한 말입니까? 편지를 쓰자마자 인사도 안 하고 다짜고짜로 ‘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1장 11절 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2장 9절에도,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인정했다는 겁니다. 누가 나를 사도로 임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사명을 주셨고 먼저 사도된 제자들도 이것을 분명히 인정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에 베드로가 잘못했다고 생각될 때에 베드로를 엄청나게 책망을 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뭔가를 자랑하기 위해서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나중에 사도된 그가 수제자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자기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사도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이제 후로는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합니다. 사도가 맞느니 안 맞느니 해서 나를 괴롭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열심히 목회하느라고 하고 있는데 교인들이 “저 분이 목사 맞긴 맞아?”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 말씀 연구하고 전하기도 바쁜데 “목사 맞아? 어디서 제대로 교육은 받았어?” 이렇게 나오면 그것도 설명을 해야 됩니까? 얼마나 처량하고 괴롭겠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이 다른 지역을 여행하거나 이사를 하게 되면 제대로 된 목사인지를 확인할 필요는 있습니다. 제대로 된 목사인지 확인할 방법이 있어요? 쉽지 않습니다만 쉽게 아는 방법은 교단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말을 잘 듣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말 목사님이 제대로 된 목사님 맞아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이 당한 꼴이 그겁니다. 자기가 잘 가르쳐 놓았는데 어느 날 ‘바울이 진짜 사도가 맞아?’ 그런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런 말을 하더라도 너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왜 사도권을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합니까? 이 문제가 해결 안되면 사도 바울이 열심히 가르쳤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힘이 없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3장부터 정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논쟁을 시작합니다. 그 전에 내가 정말 사도인지 아닌지를 확인시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그 두 내용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인데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감격스럽게 잠시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3장부터 시작하는 거죠. 몇 해 전입니다마는 광고에, 어느 유명한 배우가 보트에 누워서 고함치는 것 있죠? “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 무슨 뜻입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맛을 아는 사람이 그게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이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아는 나는 정말 행복해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설명을 해 줘도 모르는 겁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러니 ‘게 맛을 아느냐’고 소리칠 수밖에 없어요. 아이들이 콩을 잘 안 먹죠? 이게 건강에 얼마나 좋은 겁니까? 밭에서 나는 고기라고 하는데 밥에 얹어서 주면 하나씩 가려냅니다. “이게 얼마나 좋은데 그걸 왜 가려내느냐?” 하지만 안 듣습니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안 들으면 한 두 번 하다가 말아야지요. 몸에 좋은 것, 맛있는 것이라고 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참 답답한 사람입니다. 전라도 지방에 가서 이런 말 하지 마세요. “싱싱한 가오리 무침 너무 맛있더라.” 거기서는 무엇을 맛있다고 합니까? 푹 썩은 것! 가오리 썩힌 것이 너무 맛있다고 해서 제가 입을 한번 대어 보았는데 거북스럽더라구요. 입에서 귀에서 바람이 푹푹 나와야 그게 진짜라는데, 그렇다면 전 진짜를 구경 못한 셈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가오리 싱싱한 것이 맛있더라고 하면 그런 맛을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참 답답한 겁니다. 맛을 아는 사람이 못 먹는 사람을 쳐다보면 참 불쌍하죠?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이렇게 멋진 일이라고 외치는데 그걸 알지 못하고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우기는 사람을 보면 참 답답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해주려고 얼마나 애를 쓰세요? 맛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설득해야 합니다. 온갖 감언이설을 동원해서라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설명해내야 합니다. 그걸 사도 바울은 3장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걸 얘기하기 이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있습니다. 이 본문을 둘로 쪼개어 본다면 앞부분은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이 좀 어려워서 간략하게 추려 보겠습니다. 우선 15절과 16절을 뼈대만 추려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유대인’ 몇 자 건너뛰어서 ‘로되’라는 말 있죠? ‘우리는 유대인이로되’ 또 조금 건너뛰어서 16절 중간쯤에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렇게 연결하세요. ‘우리가 유대인이지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렇게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율법을 믿고 율법을 따라서 살았는데 그래서 다 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대인이지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더라. 왜냐하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면 16절 끝에 보세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으로 온전케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유대인이로되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노라고 하는 겁니다. 비유컨대 율법을 믿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마치 전등불이나 호롱불을 켜 놓고 살았던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양입니다. 태양이 밝게 떠올랐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전등불이나 호롱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전등을 켠다는 것은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일입니다. 스위치도 올려야 하고, 고장 나면 고쳐야지요, 수명이 다 하면 전구도 바꾸어야지요. 형광등에 왜 불이 안 오는지 전구를 움직여 봐야죠? 초크전구를 넣었다 빼었다 해 봐야지요? 그것도 안 되면 안전기 갈아야지요. 전기세도 내야지요. 복잡합니다. 태양이 밝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지요? 스위치를 올려요, 세를 내요, 고치기를 해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커튼을 열면 됩니다. 아니면 밝은 곳으로 나가면 끝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마치 전등불이나 호롱불과 같은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태양이 떠오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율법을 헐어버렸습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에 유대인들의 말대로 한다면 내가 헐어버린 그 율법을 다시 세워야 하느냐? 18절이 그 말씀입니다, ‘내가 만일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여기의 범법한 자라는 말은 배신자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무슨 배신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베푸셨는데 이것을 팽개치고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자가 되는 셈이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율법과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을 하는지 19절을 보십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한 소절 건너뛰고 ‘죽었나니’라고 말합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는 율법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바울은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 만만했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함은 없노라’고 비명을 지르는 겁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은 내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는 겁니다. 이건 비명입니다. 그 율법이 나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보니 그건 전혀 율법 준수도 아니더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리지만’ 이런 것들은 채소 중에서도 가장 분량이 작은 것입니다. 조그마한 채소 하나까지 정확하게 하나님께 드리지 않느냐?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십 원짜리까지 십일조를 드리지만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책망합니다.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킬 수는 있지만 율법의 정신까지는 만족시킬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나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에서 건져내랴’ 비명을 질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얼마나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까? 율법에 충실한 그가 이런 비명을 지른다면 이건 믿어줄 만한 말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이 이런 소리 하면 별 위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철저했던 바울이 이런 말을 하면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많은 재산을 가지는 것, 공부 많이 하는 것, 심지어 부인이 많은 것이 다 허무하다고 하면 말이 됩니다. 제가 “돈? 그거 허무한 겁니다.” 이러면 별로 말 발이 안 서요. 솔로몬이 누릴 것 다 누려보고 하는 말이 “이거 다 허무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맞는 말입니다. 다 가져봤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온 율법에 충실했던 바울이 그 율법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말하면 이건 맞는 말입니다. 다시 19절 그 다음 부분에,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과 사도 바울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어떤 겁니까? 자신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헤어지기만 해도 별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죽은 겁니다. 죽은 자식 붙들고 아무리 눈물 흘려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옛날 제 선생님 중에 술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다른 학교로 이동을 하면서 ‘술 안 먹는 티를 좀 내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다른 학교에 가서 술 못 먹는다고 했답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다 그렇게 생각이 굳어갈 즈음에 처음 보는 선생님이 막걸리 한잔을 무심코 권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분이 잠시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무심코 그걸 받아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는데 ‘어 잘 먹네?’ 이렇게 된 겁니다. 술을 전혀 못하는 것처럼 두 달 동안 살았지만 그 분이 술과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닙니다. 술이 자기와 죽은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심결에 들통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안 먹는 척 하는 것도 참 어렵더라. 그래서 포기하고 먹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랑한 것이 자기 부친 성함이 한흑구씨인데요. 유명한 분입니다. 옛날 중학교 책에 ‘보리’라는 제목의 수필이 실릴 정도로 유명한 작가이십니다. ‘차에 싣고 가던 나무로 된 술통이 떨어져 아스팔트에 쫙 깔렸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걸 빨아 먹었다는데 그 아들은 오죽하겠느냐?’ 하면서 술을 많이 드셨던 분입니다. 아닌 척 해도 살아있는 겁니다.
혹시 누군가가 전화해서 “좋은 데 놀러갈 데 있는데?” 하고 전화 오면 “오늘 주일이잖아?” 그래서 갈 마음조차 없다면 죽은 겁니다마는 “나도 갔으면 좋겠는데, 하필 주일이라서 안되겠다.” 이러면 아직도 뭔가 살아있는 겁니다. 이게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니에요. “야, 공돈 생길 일이 좀 있는데 생각 있냐?”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으면 그 공돈하고 나는 끊어진 것이지만 “가보고 싶긴 한데 내가 참...” 이런 생각이 들면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닙니다. 바울은 ‘내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행위와는 완전히 끊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그럼 사도 바울은 아무 일도, 아무 것도 안 했느냐 말입니다. 사도 바울만큼 많이 헌신한 사람이 또 누가 있습니까?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나는 행위와 완전히 관계가 끊어졌다고 말하면서 그가 아무 것도 안 했습니까? 사도 바울만큼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충성스럽게 일하면서 왜 그래요?
행위와는 완전히 끊어졌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은 감사는 넘쳐 났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럼 뭡니까? 나는 아무런 행위 없이 믿는다는 것 그것 하나 때문에 내가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 감사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한 것 아닙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은 감사는 넘쳐났던 사람입니다. 모양은 비슷할는지 몰라도 이것은 너무나 다릅니다. 그 감사를 뭐라고 표현합니까? 20절을 다시 읽읍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구절 외우신 분 많죠? 외우면 외울수록,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구절입니다. 바울의 위대한 고백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말합니다. 과거에 나는 죽었습니다. 이제 살아있는 것은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사울은 죽고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났습니다. 이제 살아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율법이 나를 죽였지만 믿음이 나를 살렸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껍데기는 사울이지만 속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율법에 매여 비명을 지르던 그가 이렇게 살아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가?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다. 이 외침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다, 이 믿음 안에 내가 살고 있다. 그런 고백입니다. 율법을 따를 때 지르던 그 비명이 사라지고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감격을 누리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는 겁니다. 너희가 이 맛을 아느냐고 고함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가 감히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따라가며 ‘사도 바울이 정말 사도가 맞냐?’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놀라운 감격을 외치고 있는 겁니다. 믿는 우리 속에 주님이 살아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내가 아니라 주님이 살아계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 속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께서 살고 계신다는 이 감격, 이 기쁨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감격하며 감사하며 기뻐하고 있습니까? 처음에 말씀드린 구인광고 쪽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즘같이 직장 구하기 어려운 때에 열심히 일하면 150만원 보장하겠습니다. 이것만도 참 감격스러운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심한 경우에 팔다리조차 없는 사람에게 “열심히 하시면 150만원 드릴 수 있습니다.” 이건 복음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켜낼 능력이 없는 인생에게 율법을 주면서 구원을 얻으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복음이 아닙니다. 심한 경우 약 올리는 경우밖에 더 되겠습니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렵다고 말씀하십니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얼마나 놀랬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부자도 못 들어가는데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들어가겠어요? 예수님의 답변이 뭡니까? 제자들의 그 충격에 예수님의 답변은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을 하실 수 있느니라’입니다. 사람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능력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에게는 “열심히 일하면 이 정도 벌 수 있습니다.” 이건 복음이 아닙니다. 정말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일하지 않아도 월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래야 복음입니다. 전혀 일할 힘도 능력도 없는 사람은 일 안 해도 먹여 살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일하지 않고 삯을 받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로마서 4장 4절에서 8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일할 곳이 없어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돌아다니는데 누가 일을 시켜줘야 말이죠. 그런데 해가 다 져가는 저녁에 어떤 주인이 나와서 일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해야죠 하고 따라갔습니다. 한 시간 정도 일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도 있는데 한 시간 일했는데 몇 푼 주겠냐? 이러고 건성건성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루치 일당을 다 주더란 말입니다. 얼마나 기분 좋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시면서 이게 무슨 이야기라고 하셨나요? 뭘 설명하면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어떤 곳인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일할 능력도 없고 힘도 없고 일할 곳도 없는 이 사람을 먹여 살리려면 일을 조금 시켜 놓고도 하루 일당을 다 줘야 식구들이 먹고 살 것 아니냔 말입니다. 내가 주고 싶어서 줬다고 말씀하시죠?
바울은 내 능력으로 내 힘으로 도저히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은혜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생각 밑에 우리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깔려 있는 겁니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엄청나게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셨고 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말합니까?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겁니다. 야고보서는 왜 행함을 강조합니까? 능력이 전혀 없지만 취직이 되었으니, ‘혹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나씩 배우고 노력해 보자.’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서도 그 전체 밑바탕에 흐르는 사상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구원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반면에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는 ‘값을 주인의 아들이 다 지불했으니 그냥 오기만 하라. 너 일할 능력이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도무지 능력 없는 존재라는 걸 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해집니다.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었으니 우리가 감사하고 열심히 뛰어야 하지요. 그게 야보고서입니다.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3장에서 이야기하기 전에 너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겠느냐고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너희가 이 기쁨, 이 기분, 이 맛을 아느냐?’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느니라!’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느냐는 겁니다. 바울의 감격입니다. ‘무능한 내가 죽고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이 놀라운 일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니라.’ 이게 바울의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바울이 말하는 이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능력이 없고, 일할 곳도 없는 우리에게, 일하지 않고도 월급을 주겠다고 초청을 한 겁니다. 우린 그 초청에 응한 겁니다. 이게 얼마만한 기쁨인지 웬만하면 아시지 않습니까? 직장 못 구해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그 분들의 입장에서 한번 느껴 보세요. 일할 능력도 없어서 쩔쩔매던 내게 ‘그냥 오라’는 겁니다. 그냥 오면 월급을 주겠다는 겁니다. 이게 어떤 기쁨인지 알아야 합니다. 일 끝나기 직전에 와서 ‘얼마 받겠느냐?’ 하고 있는데 하루 품삯을 다 주더라는 이런 기쁨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거저 용서받은 죄인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20절을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감격을 누리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면서 사십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