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한탄

효자제일교회 목사:홍 순관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개역, 창세기 6:1~12]

기름값 때문에 걱정이 되십니까? 제가 오늘 먼 길을 다녀왔는데 정말 기름이 많이 듭디다. 아마 전국이 이렇게 시끄러운 것도 기름값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기름 많이 쓰세요? 앞으로 좀 내려갈까요? 땅속의 기름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기름값이 내려가리라곤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껴 쓰면 좀 내려갈 수 있겠지만 우리 다음 세대에는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땅속에 파묻혀 있는 기름이 원래 어떻게 만들어진 거죠? 땅속에 짐승들이 묻히고 열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확실한 것처럼 가르치지만 학자들이 보는 책을 찾아보면 결론은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대체로 ‘아마도 생물의 유기체가 변형되어서 생성된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추정한다’라고 말을 맺는 것은 자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 학자들은 그렇게 희미하게 말을 할까요?

 

기름의 성분을 분석해 보면 동물의 유기체, 말하자면 시체에서 만들어진 것 같긴 한데 그렇게 말을 하려니 양이 너무 많은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짐승이 매몰되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는 겁니다. 승용차 한 대가 기름을 얼마나 소비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한 달에 보통 삼십만원 정도 소비한다고 치면 그 양이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땅속에 묻힌 짐승들의 크기를 돼지 크기라고 치면 돼지 몇 마리 분량이 되는지 계산을 한번 해 보세요.

한 달에 삼십만원어치의 기름을 소비한다면 아무리 후하게 계산을 해도 큰 돼지 두 마리 정도가 만들어 내는 기름을 자동차 한 대가 소비하는 셈입니다. 일반적으로 승용차 한 대가 돼지 두 마리 분량의 기름을 소비한다고 치면 포항에 승용차가 한 20만대 정도 되나요? 그렇게 칩시다. 승용차 20만대가 한 달에만 40만 마리를 소비하죠? 일 년이면? 승용차를 1, 2년 썼습니까? 공장이나, 배, 비행기에 들어가는 기름을 제외하고도 그렇습니다.

포항 인구가 전부 50만입니다. 이 50만이라는 인구를, 표현이 좀 험합니다마는, 기름을 짜듯이 전부 짜도 한 달도 못갑니다. 그럼 거꾸로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짐승을 땅속에 갖다 묻어야 이런 양의 기름이 나오겠습니까? 상상이 안 되는 겁니다. 대충 계산을 해도 현재 지구상에 있는 모든 짐승과 모든 인류를 한꺼번에 다 구덩이에 파묻는 일을 몇백 번 반복해야 현재 사용하는 기름이 나올 듯 말 듯합니다.

 

땅속에 묻혀 있는 기름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짐승이 땅속에 묻혔겠는지 상상해 보세요. 과거 어느 때에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짐승이 한꺼번에 땅속에 파묻힌 일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창세기 7장 22절에 온 세상을 뒤덮는 홍수가 육지에서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물을 한꺼번에 죽였답니다.

성경에 있는 이런 구절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어떻게 합니까? 땅속에 있는 기름이 이걸 보여주고 있는 걸요. 땅속에 있는 석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석탄의 양도 어마어마합니다. 원유의 11배라고 합니다. 땅속에 파묻힌 화석도 그런 일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화석이 어떻게 만들어진다고 배웠습니까? 강물에 시체가 떠내려 가다가 강 하류에 가서 물의 흐름이 떨어지면 강바닥에 떨어지게 되고 그 위에 모래가 덮이고 덮여서 훗날 이것이 눌리고 열을 받아서 화석이 되었다고 배웠습니다. 교과서에 그걸 보여주는 그림까지 있었습니다. 그 그림이 학생백과 같은 곳에는 지금도 있습니다. 교과서에는 이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이 안 돼요. 그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거의 모든 화석이 퇴적암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개 한 마리가 화석이 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개 한 마리가 강물에 떠내려 갑니다. 강 하류에서 바닥에 떨어지고 모래가 차곡차곡 덮습니다. 개 한 마리를 완전히 덮을만큼 강바닥이 높아지려면 몇 년이 걸리겠어요? 한 오백년 걸릴 겁니다. 그 기간 동안 이 개 한 마리가 썩지 않고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는 개 화석이 생길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화석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매몰될 때에 생긴다는 얘기를 제가 처음 확인한 곳은 영덕 가다 보면 나오는 화석박물관입니다. 화석은 갑작스럽게 파묻혔을 때에 생기는 겁니다. 문제는 화석이 들어있는 퇴적암이 그렇게 생긴다고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매몰되느냐고요?

갑자기 대홍수가 나서 온 세상을 뒤덮었다가 갑자기 멈춥니다. 그렇게 형성된 것이 화석 아니냐는 얘기죠. 어느 것이 맞는지 학자들은 늘 싸웁니다만 성경은 과거에 엄청난 홍수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고 말합니다. 화석이 그 흔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 홍수에 대한 얘기를 자세히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6장 1, 2절을 봅시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 구절에서 옛날부터 논란이 된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를 의미하는 거냐는 겁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타락한 천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도 하지만 천사가 사람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다는 사상은 성경에 전혀 없습니다.

더군다나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 다음에 사람의 딸, 4절에 나오는 네피림, 그 다음에 나오는 용사, 이런 사람을 통틀어서 하는 말이 7절에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딸은 전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앞 장에 두 계열의 족보가 나옵니다. 가인의 후손에 대한 족보가 나오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던 셋의 후손들 이야기가 나오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분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 합니다. 이게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주목하셔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을 설명을 하시면서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고 말합니다. 아니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이것은 정상적으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 얘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정상적인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추악한 일, 성적 문란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딸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육체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육체의 아름다움을 찬양의 대상으로 삼고 비슷한 모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마는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아름다움도 대단하지만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오히려 육체를 희생시키거나, 혹은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육체의 한계를 극복해 낼 때 사람들은 진정한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저 육체의 아름다움만을 노래하는, 가령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같은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사회는 질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값어치는 이런 육체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닌데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최고의 것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말에서 문제되는 것은 ‘모든 자’입니다. ‘모든 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아무라도 자기 마음에 들기만 하면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 정상적인 결혼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죠. 마음에 들기만 하면 누구와도 잠자리를 함께 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전혀 낯선 생각이 아니잖아요?

 

요즘은 좀 조용합니다마는 오래 전에 마광수라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분이 무슨 얘기를 했고 무슨 글을 썼는지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사설 하나를 읽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이 글을 읽고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사람을 억압하는 가장 큰 문제는 성 문제다. 그래서 사람을 성문제에서 해방을 시켜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결혼제도를 없애고, 순결개념, 정조개념 없애라는 겁니다. 나이나 이런 것 저런 것 다 따지지 말고 누구와도 잠자고 싶으면 다 자도록 허용을 해 줘라. 그렇게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질 수 있게 허용해 줘야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입니다.

그 글을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소감을 물었더니 공부 잘하는 아이가 딱 한 마디 합디다, “선생님 개같이 살자는 얘기네요.” 맞습니다. 딱 정답입니다. 욕을 할 때 왜 개를 들먹이는지 아십니까? 개는 자라면 어미와 교미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들을 수 있는 욕들이 대부분 이런 뜻입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것을 가리킬 때에 개를 들먹이는 것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그 신문을 들고 다니다가 잃어버렸습니다. “야 이거 아이들 가르치기에 좋은 자료인데 잃어버렸다. 이게 언제 신문이지? 매일신문인 것은 틀림없는데 몇월 몇일 것인지 모르겠다.” 그랬더니 누가 빙긋이 웃으면서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인터넷 들어가서 아무데나 두들겨 보세요, 그런 글 수북이 나옵니다.” 이러더라구요. 그래서 더 이상 찾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유를 위해서 열심히 글도 쓰고 외쳤던 그 분이 얼마나 자유로워졌습니까? 세월이 좀 흐른 후에 그 분 소식을 들었는데 정신병원에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부인이 집을 나갔다는 얘기도 들리고... 부인이 집 나가지 집에 붙어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노아시대에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겁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반면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동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인간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 3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셨습니다. 예전 성경에 보면 ‘육체가 됨이라’고 하죠.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완전히 육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더니 뭐가 되었다고요? ‘생령이 된지라’ 생령? 말이 참 어렵고 번역상의 문제가 있기는 있는 표현입니다마는 생령 그대로 설명해 볼께요. ‘살아있는 영’ 그래도 표현이 좀 이상하죠? 죽은 영도 있고 살아 있는 영도 있나요? 살아있는 영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가 있는’이란 뜻입니다. 육체가 있는 영혼이라는 거예요.

육체가 있는 영혼을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예를 보여주셨어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데 문을 다 잠궜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 생각에는 귀신이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너희들에게 먹을 것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무덤에 사흘이나 있었던 분이 나타나셔서 왜 먹을 것을 찾느냐?”고 했더니 누가 “사흘 동안 굶으셔서 그렇다.”고 합니다.

영은 못 먹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잡수시더라? 육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실 때는 문을 안 열어 드렸는데 그냥 사라져 버리시거든요. 이건 영이잖아요? 그냥 들어오셨다가 그냥 사라지는 것은 영인데 만져보라고 하니까 만져지고 먹을 것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령을 육체가 있는 영혼이라고 설명을 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육체가 있었지만 영적인 존재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타락해 가더니 결국은 영적인 면은 다 잃어버리고 육체만 남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저히 인간과 함께 거할 수 없더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영적인 존재가 육체가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보기 싫은 것 참 추한 것인지 우린 상상이 안 됩니다.

이걸 우리 사람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겁니다. “야, 그 사람 인간인 줄 알았더니 짐승이데?” 이런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지내보니까 짐승이더라? 이거 어떤 느낌을 줘요? 영적인 존재로 만들었는데 영적인 아름다움은 다 잃어버리고 육체만 남은 존재가 되었더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저히 인간과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고 그래서 인간을 심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가를 여기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만 그랬습니까? 소돔 고모라가 멸망당한 이유가 뭡니까? 성적인 문란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가나안 백성들을 씨도 없이 죽이라고 한 이유가 뭡니까? 주 원인은 성적인 문란입니다. 그 성적 문란이 꼭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우상숭배가 묻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을 수 없는 악한 일들이 홍수 이전에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성적으로도 깨끗한 삶을 사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놀립니다. 사는 재미를 모른다고 놀립니다. 심지어 천연기념물이라는 말도 있었잖아요. 한평생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서 정조를 지키며 사는 이런 인간이 어디 있냐? 그래서 그런 인간이 있으면 전부 천연기념물 길이 길이 보관해야 할 희귀한 존재로 여겼더라는 말입니다. 우리 생각 아닙니다. 일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보기에는 당연한 일을 가지고 말이에요.

 

한 가지 악한 현상이 더 나타납니다. 4절 보세요, ‘당시에 땅위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의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더라’ 고대에 명성을 날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네피림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합해서 낳은 자식들과 관계가 있는 겁니다.

네피림이라는 말의 기본 뜻은 ‘장대한 자’ 입니다. 그래서 아마 이 장대한 자는 고대의 권력자 힘이 곧 권력이 되던 시대의 권력자였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렇게 권력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결합해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 유명하다는 뜻은 악명이 높았더라는 뜻입니다. 11절에 보시면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며’ 이 포악함의 장본인들이 바로 4절에 나오는 용사들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권력과 힘을 합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부흥합니까? 썩습니까?

기독교가 국교로 되어 버리면 권력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에 덕이 될까요?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되면 교회가 굉장히 성장해 가는 것같이 보입니다. 전 국민이 다 교인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나 지나간 교회사는 그런 경우에는 외형상으로는 교회가 성장하고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그런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강제로 하나님 앞으로 끌고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권력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결과적으로 교회를 속으로 골병들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권력을 교회가 가지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이롭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회는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상대로 함부로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만약에 어떤 불법을 저질러도 감히 덤빌 사람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힘이 있어서 좋다고요? 아니요! 교회가 썩어가는 징조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힘이나 권력으로 성도들을 억압하거나 일을 하게 하는 것은 절대로 교회답지 못한 일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마는 그 권위가 힘이나 억압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무슨 권위입니까? 사랑하고 희생하는데서 나온 권위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성도들은 더더욱 존경하면서 그 권위에 굴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회는 여기에 등장하는 네피림, 용사, 악명높은 사람들처럼 힘을 가지고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박해 받을 때는 곧 쓰러질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질적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비슷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전쟁에서 노획한 말의 발의 힘줄을 다 자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노획한 말은 아주 유용한 병기, 군사무기가 될 수 있는데 폐기처분하라는 겁니다. 강력한 무기를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가지지 말라’ 말을 많이 가지면 어떻게 됩니까? 힘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 힘 가지고 나라를 지키고 그 힘 가지고 백성을 다스릴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하는데 고대에 이 유명한 자들이 힘과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억압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 역시도 차마 볼 수 없는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땅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해서 다 쓸어버리려고 하셨습니다.

 

8절 보셔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번역이 약간 다릅니다. 우리말 성경은 의역을 한 겁니다. 직역을 하면 ‘노아는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더라’ 입니다. 히브리 원문도 그렇습니다. 온 세상을 멸해 버려야겠다는,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 하나님의 눈 속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더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고치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화가 몹시 나서 매를 듭니다. 부모가 매를 들었을 때 아이들의 반응이 참 재미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별로 맞은 것도 아닌데 맞은 것만 기억합니다. 뭘 기억하지 못하죠? 왜 맞았는지를 기억하지 못 합니다. 자기가 뭘 잘못해서 맞았는지는 전혀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엄마나 아빠가 매를 들었다는 것만 기억합니다. 그나마 철이 좀 들면 우리 엄마가 왜 매를 들었는지 압니다.

그런데 아빠가 매를 들면서 매 맞는 나보다 매를 든 아빠가 더 힘들고 가슴이 아플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닙니다. 평생에 그런 아들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집에서 쫓겨난 아이가 ‘날 쫓아내고 우리 아빠가 얼마나 가슴 아파 하고 있을까?’ 그런 아이 있겠습니까?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 하나님의 눈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분노 속에서도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가슴 아파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노아가 읽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정말 무섭습니까? 어릴 때부터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 중에서도 구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건 마치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아이하고 비슷해요. 아이가 그렇게 두렵게 여기던 그 아버지가 어느 날 자식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자식은 아마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구약성경을 찬찬히 읽어보시면서 그렇게 분노하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얼마만한 아픔이 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시기에 이렇게 분노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읽을 수만 있다면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도 참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까지 표현하셨습니다.

여자들에게 애인이 ‘나도 질투하는 남자다’라고 할 때 무슨 느낌이 드느냐고 물었더니 대부분 ‘쪼잔스럽다’든가 ‘남자가 쩨쩨하게 무슨 질투를 하냐?’ 그런다네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아세요? ‘나도 질투할 줄 아는 하나님이다’ 거기다 대고 쪼잔하다 그러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런 소리를 들을지언정 ‘나도 질투할 줄 아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구약성경을 잘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 드러나는데 노아가 그걸 읽었다는 겁니다. 인류를 완전히 멸망시키려는 것은 하나님의 본뜻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약속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온 세상 사람들을 한꺼번에 다 쓸어버리면 창세기 3장 15절이 헛말이 되는 겁니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하신 여자의 후손이 오기까지 인류를 보존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노아가 없었더라면 온 인류가 다 멸망해 버렸을까요? 아니요! 하나님은 이 약속을 이룰 그 누군가를 또 찾고 계셨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누군가를 찾다보니 눈에 뜨인 사람이 노아였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살펴보았더니 ‘아 효자제일교회 누군가 보이더라’ 이런 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에 하나님의 눈에 뜨이게 되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사시대는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온 사방의 이방인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 암울한 시대를 끝낼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야겠다고 세상을 두루 살피셨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일꾼을 보낼까 하는 하나님의 눈에 기도하는 여자가 보인 겁니다. 무슨 대단한 기도를 드렸나요? ‘우리 민족을 살려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아닙니다. 무슨 대단한 기도를 한 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내게도 아들 하나 주세요, 분하고 원통해서 못살겠습니다. 아들 하나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 한 여자를 발견하고서는 하나님께서 그 여인을 통해서 그런 인물을 보내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귀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 편에서도 이런 사람이 필요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식구가 구원을 얻은 이유를 노아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겁니다. 노아의 편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역사하실 만 했다는 겁니다. 악이 충만한 사회에서 의인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당대에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을 보세요. 온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역겨울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에 사는 이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배를 만들라고 하셨죠? 그 앞에 나와 있는 120년이 배를 만드는 기간이었는지 사람의 수명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이런 저런 이론들이 있습니다마는 둘 중의 하나이겠지요.

어쨌든 배 만드는 기간이 엄청나게 긴 기간이었음에 틀림이 없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산꼭대기에서 온 가족이 배를 만들고 있었다? 그 시대 상황으로서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흔들리지 않는 가정이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IMF 사태가 터지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쳤을 때 깨어진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주변을 한번 보세요, 엄마 없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옛날에는 아버지 없는 집이 많았는데 요즘은 엄마 없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정이라는 것이 워낙 허약하게 이루어져 있으니 이런 조그마한 충격에도 깨어져버리는 것입니다.

노아의 식구들은 그 긴긴 세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 식구들은 온전한 가정을 이루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었더라는 겁니다. 이거 쉬운 일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복받을 짓을 하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이게 옳고, 이게 즐거운 것이다’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꿋꿋하게 미련하고 바보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 아닙니다. 인간을 너무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한탄하신 겁니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그렇게 귀한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면 단칼에 없애버리면 끝날 일입니다. 자기가 만드셨잖아요? 한번에 끝내버리면 되는 거죠. 그런데 한탄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인간을 귀하게 만드셨고 그 인간들을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 인간들을 다른 길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여시겠다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끝내지 아니하시고 필요한 사람을 불러서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셨습니다.

이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든지 간에 하나님의 백성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어딘가에 써야겠다고 두루 찾을 때 하나님의 눈에 뜨여서 쓸만한 그릇이 되셔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 세상 속에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이루어나가기에 적합한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그 옛날 사람들의 상상에서 나온 얘기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아마 오늘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한 증거로 땅 속에 그 많은 기름, 석탄, 화석을 하나님께서 묻어두신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 분노로 일그러져서 온 세상을 심판하려는 그 하나님의 분노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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